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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알수록 가까워지는 우리 문화재 - 수원 화성
작성일
2005-05-2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117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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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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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을 고달프게 하지 않는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조가 승하한 날‘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짐을 참지 못하였고,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고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만큼 정조는 당시 백성을 근본으로 한 실학자의 정신적 지주였고 실천가였다. 다산 선생의 집필도‘정조문화’의 한 산물임은 그가 집필한 책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정조는 즉위 초, 문치를 선언하고 송조의 제도를 본받아 규장각을 개설하게 된다. 신진관료는 초계(抄啓)문신제를 통해 40세까지 재교육을 하여 학문정진을 자극하고, 영민한 서얼출신을 기용하여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용하였다. 이들 초계문신에는 정약용·정약전 형제 등이 있었고, 검서관에는 유득공·박제가·이덕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후일 화성 건설과 실학사상 전파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문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던 정조는 즉위 20년을 전후해 큰 구상을 하게 되는데, 바로 수원부에 화성(華城)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식된 도리로 ‘효’를 내세워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 눈물로 세월을 보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 건설의 현장인 화성행궁에서 성대히 치르고자 하였다. 1789년, 정조는 이 구상을 실천에 옮긴다. 먼저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을 수원의 명당인 화산(花山)으로 옮기는데, 이때 정조의 일관된 신념은 반드시 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뒤이은 역사인 화성 건설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정조는 승하할 때까지 무려 13번이나 수원으로 능행을 계속하였는데, 도화원에서 그린 <수원능행도>는 정조 시대의 문화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수원 화성의 장엄함과 완벽함

한편, 정약용의 초안에 의해 완성된 수원 화성의 둘레는 4600보(1보는 주척으로 6척, 약 1.2m)에 이르렀다. 이 성을 만들 때 실제 전투에서 유리하도록 성을 비스듬히 쌓는 축성을 검토했다든지, 유형거 등 수레를 종류별로 운영하고 거중기를 사용하는 등 많은 특징적 방법이 이용되었지만, 수원 화성 축조의 특장점은 효율화·표준화·실용성·상징성·건축미학 그리고 철저한 기록 이 여섯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노임방식에 변화를 두어, 일의 효율과 전문성에 따라 차등임금을 지급하였다. 조선 초기, 자기가 먹고 입을 것을 준비하던 부역제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실용성 면에서 보면 화성 건설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졌는데, 각 성문에는 옹성(甕城)을 쌓아 유사시 적의 성문 접근을 막고, 성문의 좌우에 적대를 쌓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망루의 역할과 군사를 숨기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공심돈(空心敦)을 만들고 치성(雉城)을 일정간격으로 두었으며, 포루는 포와 화살의 공격거리와 위치를 가늠하여 설치토록 하였다. 설치방법은 포루도 설, 옹성도설 등에 근거해서 설치했다. 화서문을 들어서서 동북각루(방화수류장)에 올라 버들가지 하늘거리는 용연을 바라보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개천 위에 북수문을 건설하였는데, 화홍문(華虹門)이라 불리는 누각을 올리고 7개의 홍예 아래에 맑은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돌, 나무, 벽돌 등 각기 다른 재료를 써서 어울림의 미를 창안했는가 하면 바람, 초목, 흐르는 물마저도 건축과 어울리게 한 점 등은 200여 년 전 화성을 축조한 인물들을 미학의 선구자로 여기게 한다. 화성 건설에 있어 철저한 기록도 큰 의미를 갖는다. 정조가 서거한 다음해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과 동원된 사람의 인적사항, 축성재료의 출처, 용도, 예산 및 임금, 사용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성곽 축성에 관한 최대의 보고서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앞서 최초로 화성의 건축미를 국제사회에 알린 것은 프랑스로, 프랑스 E.J부릴 출판사가 100여 년 전에 펴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이다. 28쪽에 불과하지만‘18세기 판화와 역요약’이란 글에서 그 방대함과 완벽성을 말하고 있다.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수원 화산 아래,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어우러진 융건릉에 들러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곳에는 나약한 조선을 강하고 강한 문치(文治)의 나라로 만들고자 한 정조의 건릉이 있다. 그리고 복원된 화성행궁 옆에 당시 최고의 예와 정성을 다해 만든 정조의 영정이 모셔진, 간결하되 장중함을 잃지 않은 화령전(華寧殿)에 들러 ‘나는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는 정조의 이상과 신념을 되새겨 보는 엄숙한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의미가 깊을 것이다.

차문성 /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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