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손맛 ‘한국 전통의 떡’
작성일
2016-07-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185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손맛 ‘한국 전통의 떡’ 주요한 나랏일이나 집안의 경조사가 있을 때면 복(福)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빚었던 우리 전통의 떡. 재료 준비부터 빚는 과정 내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임에도 그 명맥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던 까다로운 합병, 두텁떡과 함께 전통 떡메치기의 수고로움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한다.

빚는 방법 따라 이름도 각양각색

우리는 떡을 흔히 쌀의 재료에 따라 멥쌀떡 혹은 찹쌀떡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멥쌀떡이든 찹쌀떡이든 그 만드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기 때문에 이 지칭 방법은 옳은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도 같은 지칭 방법을 채택하여 멥쌀떡을 경미병(粳米餠), 찹쌀떡을 점미병(粘米餠)이라 했다. 경미병이든 점미병이든 쌀을 쪄서 절구에 치는 떡은 자(餈), 쌀가루로 만들어 찐 것은 고(糕)라 했다. 찹쌀이 주재료인 인점미(引粘米, 인절미)와 멥쌀이 주재료인 백병(白餠, 가래떡)·절병(切餠, 절편)은 자에 속하고,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로 만든 시루떡은 고에 속하는 셈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쌀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떡, 쌀가루에 소를 넣고 다양한 고물을 재료로 하여 찐 떡, 쌀가루를 쪄서 안판에 올려놓고 목추(木椎)로 친 다음에 다양한 여러 소를 넣고 반죽하여 만들거나 이것에 다양한 고물을 묻힌 떡, 찹쌀을 쪄서 안판에 올려놓고 목추로 쳐서 찰기를 내어 여러 소를 넣고 반죽하여 다양한 고물을 묻혀 만든 떡 등으로 분화하였다.

민중들은 정월과 2월에는 송편을 만들고, 2월과 3월에는 개피떡·산병·꼼장떡을 만들었다. 3월과 5월은 잔절편을 만들고, 6월과 7월은 증편·깨인절미·밀쌈·깨편을 만들었으며, 8월은 호박떡과 송편을 만들었다. 9월은 두텁떡·밤경단·주악을 만들고, 10월과 11월, 그리고 12월에는 밤경단·콩경단·쑥구리를 만들어 먹었다.

까다로운 공정을 거친, 궁중 떡의 정수 ‘두텁떡’

궁중 떡 중에서 민중들이 9월에 만들어 먹었던 두텁떡과 연결되는, 합병(盒餠)과 후병(厚餠)은 같은 종류의 떡이다. 조선왕조 중·후기에는 합병, 후기에는 후병이라 했다. 盒은 ‘뚜껑 합’, 厚는 ‘두터울 후’이니 원래 찹쌀가루 반죽을 접시 모양으로 만들어 뚜껑을 덮어 찐 떡이라 하여 합병이라 한 것이 세월이 흘러 모양이 두텁게 보인다 해서 후병이라 칭했던 것 같다. 이 두텁게 보이는 후병은 반가에 전해져서 ‘두텁떡’이 되었다.

궁중에서의 합병 만드는 방법은, 소금과 꿀을 넣은 찹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한 다음 달걀 크기만 하게 떼어 내 둥글게 빚고, 무르게 쪄낸 거피팥에 꿀과 약간의 간장을 넣고 번철에 담아 볶아낸다. 대추·밤·잣·계피가루·볶은 약간의 거피팥을 합하여 소로 만들어서, 베보자기를 깐 시루에 볶은 거피팥 고물을 뿌리고 둥글게 빚은 찹쌀가루 반죽을 올려놓는다. 이 위에 소를 올려놓고 다시 이 위에 둥글게 빚은 찹쌀가루 반죽으로 뚜껑을 덮고는 거피팥 고물을 뿌려서 베보자기를 덮어 쪄내는 것이다.

합병은 궁중 떡 중의 정수라고 할 정도로 찹쌀을 가루로 만드는 과정, 찹쌀가루를 반죽하는 과정, 거피팥을 삶아 볶아 거피팥 고물을 만드는 과정, 소를 만드는 과정, 찌는 과정 등 상당히 번거로운 제조 과정을 거친다. 그뿐만 아니라 대단히 맛이 있다. 이 맛있는 떡이 반가에 전해져 두텁떡이 되었다. 기계 산업이 발달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쌀을 불려서 맷돌에 갈아 습식제분을 하여 가루로 만드는 공정은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전쟁에 빗댈 만큼 고된 ‘전통 떡 메치기’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쪄낸 찹쌀밥을 안판에 올려놓고 목추로 쳐서 만드는 떡에 비하면 그 힘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1909년에 나온 『조선만화』에는 당시의 떡 치는 풍경을 전쟁에 비유했다.

판 위로 떡을 치는 일은 전쟁만화에 있을 법한 그림이다. 절구(목추)는 10전으로 살 수 없는 고가의 제품이다. 마주 보고 둘이서 친다. 매우 조심스런 일이지만 혼자서 하기에는 벅찬 일이기 때문에 둘이서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그 사이에서 잠깐 쉰다. 쌀을 찜통에서 찌는 것이 아니라 일단 쌀을 가루로 만들어 반죽하여 찜통에서 쪄서 이것을 치는 것이다. 이 떡은 진백색으로 대단히 상등이고, 미미(美味)이다.

『조선만화』는 멥쌀로 치는 떡 만드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찹쌀로 치는 떡을 만들 때에는 여전히 물에 불린 찹쌀을 쪄서 절구에 담아 치거나 안판에 올려놓고 쳤다. 1916년에 나온 『조선인의 의식주』에는 ‘찹쌀을 쪄서 안판에 올려놓고 친 다음에 여기에 콩가루·깨가루·밤채·대추채로 고물을 입힌다’ 고 했다.

안판에 올려놓고 치는 떡을 포함한 여러 떡은 궁중의 사옹원에 소속된 생물방(生物房)에서 떡만을 전문으로 만드는 남자 조과숙수(造果熟手)들의 지휘 하에 만들어졌다. 이들 밑에는 병공(餠工)이 있었다. 병공은 물론 남자노비들이다. 평생을 떡만 만드는 자로서, 일종의 조수 격인 조역을 데리고 일했다. 조역들의 일부분은 병모(餠母)라고도 했다.

평생을 본인의 일만을 전업으로 하게 했던 궁중의 사옹원 제도에서 적색(炙色, 고기 굽는 일에 종사하는 자)·장색(醬色, 장 만드는 일을 담당한 자)과 달리 색(色) 대신에 공(工)이 붙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떡 만드는 일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만화』에서도 떡 치는 일을 전쟁에 비유한 것이다.

수염을 기른 남자 3명이 한 조가 되어 머리에 수건을 쓴 채 안판 위의 떡을 치는데, 양쪽의 2명은 목추(떡치는 방망이)로 떡을 치고 있고 가운데 앉은 1명은 친 떡을 뒤집고 있다. 이 『조선만화』의 모습은 비록 1909년 당시의 민중들이지만 궁중 생물방에서의 떡만드는 과정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궁중이든 민중이든 떡 제조는 남자들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친 떡은 방으로 들여와 도마 위에 올려 놓고 홍두깨 등의 조리도구를 사용하여 잘라 인점미·절병·백병 등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떡을 만들었다. 여기에 동원된 여자들이 병모이다.

떡 만들 때 생물방 안은 대단히 분주하였을 것이다. 때로는 고물이 필요한 떡을 위하여 삶거나 쪄서 체에 내리기도 하고, 대추나 밤 등을 채로 썰어서 장만하기도 한다. 혹은 안판과 목추를 준비하여 칠 필요가 없는 합병 등과 같은, 가루를 내어 찌는 떡을 전담했다.

기계화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아름답고 맛있는 떡을 만드는 일은 전쟁과도 흡사한 치열하고도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일인 만큼 궁중의 생일잔치에서 진어찬안(進御饌案)의 가장 처음에 등장할 정도로 떡은 찬품(饌品) 가운데에서도 으뜸을 차지했다.

궁중이든 민중이든 혼례·제사·생일과 같은 날 결코 빼놓을 수 없었던 떡은 행사가 끝나면 음복(飮福) 음식 중 가장 최상의 음식이 되어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골고루 복 받게 하는데 동원되었다.

 

글‧김상보(전통식생활문화연구소 소장) 사진‧토픽이미지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