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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93년에 복원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두 번째 청사
작성일
2019-04-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819

1993년에 복원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두 번째 청사 상하이시 보경리 4호 청사를 돌아보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지금까지 첫 번째 의정원 회의가 열렸던 곳이 상하이 김신부로 2층 양옥이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첫 번째 회의가 열렸던 당시는 임정요인들의 거처에서 돌아가면서 회의를 했고 1919년 8월에 미국에서 돌아온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합류한 후 김신부로 2층 양옥에 입주할 수 있었으며 그곳이 임시정부 첫 번째 공식적인 청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안창호 선생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전까지는 임시정부청사를 마련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다가 안창호 선생이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운영하면서 상하이시 한복판의 유서 깊은 거리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에 1호 청사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형체를 찾을 수 없고 주변이 모두 패션 상가 거리로 바뀌어 있다. 01. 김구와 안공근이 창설한 한인애 국단 선서문 ⓒ독립기념관 02.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의 1호 청사에서 찍은 임정요인들의 사진 ⓒ독립기념관

김신부로 2층 양옥에 마련한 임시정부 1호 청사

안창호 선생이 미국 교민들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을 가지고 프랑스 조계지의 중심거리에 있는 2층짜리 양옥에 세를 얻어 마련한 곳이 임시정부 1호 청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주소가 샤페이루(하비로·霞飛路) 321호로 확인되는데 현재는 화이하이중루 651호 일대이다. 2019년 3월 7일자 연합뉴스에 의하면 ‘상하이시 당안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역사학자 쉬훙신(許洪新) 씨로부터 제공받은 1920년 당시 프랑스 조계 당국의 지도에 하비로 청사는 현재도 옛 모습을 간직한 쑨원(孫文·1866∼1925)의 집무 건물의 대로 맞은편에 있었다. 정확히는 현재 리복 매장 건물과 H&M 매장 건물의 가운데 자리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위 기사에 따르면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쑨커즈(孫科志) 푸단(復旦)대 역사학과 교수는 하비로 청사 건물이 훗날 헐리면서 해당 필지가 현재 두 개의 건물에 반씩 나뉘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고 나와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사라졌지만 2대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첨부된 사진을 통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동일 연합뉴스에서는 안창호 선생과 임정요인들이 1919년 10월 11일에 청사 앞뜰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기념사진에 앞에 넓은 잔디밭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웅장한 2층 석조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도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보던 김신부로 2층 양옥이 첫 번째 의정원이 열렸던 건물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2019년 3월 7일자 연합뉴스 기사를 통해 이곳은 같은 해 8월에 안창호가 미주에서 가져온 독립자금으로 세를 얻은 최초의 공식청사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동 기사에서 보면 이곳에 마련한 첫 번째 청사도 1919년 10월 프랑스 조계당국의 강제 폐쇄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물론 일본의 영향력으로 보고 있다.


푸칭리 4호에 자리 잡기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에 첫 번째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11일 임시헌법을 만들었다. 국호는 ‘대한민국’이며,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노령(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가 임시정부 의정원을 통합하여 상하이에 두기로 했다. 러시아 연해주에 두자는 의견도 강했으나 상하이로 정한 것은 외교를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는 의견이 분분해서 완전한 하나의 임시정부로의 통합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8월 초 미국에서 건너온 안창호 선생은 국무총리대리 겸 내무총장의 역할을 강화하며 「임시정부 개조안」과 「임시헌법 개정안」을 「제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제출하여 8월 28일 상정되었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가 의정원에 제출한 임시정부 개조안의 특징은 ‘한성정부’를 전적으로 존중한 것으로서 정부(정무원)의 부서도 상하이정부의 6부를 한성정부의 7부 1국으로 바꾸고 정부 각료도 상하이정부의 각료는 일제히 퇴임하고 한성정부의 명단에 따라 새로 임명하며, 오직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의 명칭을 ‘대통령’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또한 의회는 상하이의 임시의정원과 노령의 국민의회를 통합하기로 하였다. 국무총리대리 안창호는 이러한 임시정부 개조안의 제안 연설에서 “현 상하이정부를 한성정부식으로 개조하되 단 하나 다른 것은 집정관 총재만 대통령으로 그 명칭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으며, 그 근본 이유를 “전민족의 정치적 통일을 내(內)와 외(外)에 시(示)코저 함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어 위에서 말한 바로 첫 번째 청사에서 1919년 9월 6일 안창호 선생의 중재로 한성정부·상하이 임시정부·노령 국민의회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3·1운동정신을 직접 계승하고 정통성을 갖춘 유일한 ‘통합 임시정부’로 재탄생되었다. 그런데 바로 10월에 첫 번째 청사가 강제로 폐쇄되었다고 하니 그 후 임시정부는 또다시 전전하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7년 후인 1926년에야 현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있는 푸칭리(普慶里·보경리) 4호에 자리 잡게 되었다.

직접 방문한 보경리 4호 현재 건물은 많이 낡고 입구도 비좁았다. 전시장엔 임시정부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청사 안에서 전시물을 통해 중국에서 27년간의 임시정부 요인들의 삶과 여러 가지 사건을 돌아볼 수 있었다. 현재의 보경리 4호 청사는 1989년에 상하이의 도시개발계획으로 이곳 임시정부청사가 사라질 뻔했으나 우리나라와 국민의 요청에 따라 1993년 현재의 상태로 복원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보경리 4호 청사를 관람한 후에 청사 밖으로 나와 주변 동네를 돌아보았다. 비좁은 골목이 사방으로 이어진 동네는 거의 2층으로 된 가옥들이었는데 옛날 임시정부가 활동하던 때의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2층에는 창문 난간으로 대나무를 길게 걸쳐놓고 빨래를 널어놓았는데 그 빨래들을 보니 임시정부 시절에도 저런 방식으로 살았겠구나 싶어 너울거리는 빨래들이 마치 임정요인들에게 비밀정보를 주는 장치처럼 보였다. 당시에도 골목들이 거의 같은 집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일본의 감시를 따돌리고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한다.

보경리 4호 인근에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안공근의 집이 있었다는데 역시 그곳도 개발이 되어 의류매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1926년에 자리 잡은 바로 그 터 보경리 4호에 다행히 임시정부기념관이 복원되어 임시정부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충칭에 마지막 터를 잡기까지…

김구 선생과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을 창설하고 이끌었다. 김구 선생은 초기 임시정부에서는 별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상하이, 국내,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대표자 29명(출석의원 현순(玄楯), 손정도(孫貞道), 신익희(申翼熙),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이광수(李光洙), 최근우(崔謹愚), 백남칠(白南七), 조소앙(趙素昻), 김대지(金大地), 남형우(南亨祐),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조완구(趙琬九), 신채호(申釆浩),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진희창(秦熙昌), 신철(申鐵), 이한근(李漢根), 신석우(申錫雨), 조동진(趙東珍), 조동우(趙東祐), 여운형(呂運亨), 여운홍(呂運弘), 현창운(玄彰運), 김동삼(金東三))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초대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하였다. 김구는 1919년 4월 말에 상하이로 와서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돌아와 내무총장을 맡았을 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하겠다고 요청하여 경무국장 역할을 맡아 전면에는 나서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창호 선생에 의해 통합은 되었지만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과 이승만 탄핵으로 이동녕 선생이 내각을 이끌었으나 이승만의 반발로 사퇴했고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박은식 선생이 후임으로, 다시 홍진이 이끌다가 1926년에 홍진의 후임으로 김구가 내각수반이 되어 법을 개청하고 이동녕이 다시 주석을 맡았다. 그 이후에도 계파 간의 갈등이 많아 많은 임정요인들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렸다. 김구는 1931년 침체된 임시정부의 돌파구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그 첫 번째 성과가 이봉창 의거였고 두 번째 성과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였다. 이봉창은 일왕이 탄 마차를 잘못 알고 폭탄의 성능도 약해 실패했지만 윤봉길 의거는 대성공이었다. 윤봉길 의거로 상하이 보경리 4호 청사를 떠나야 했다. 프랑스도 일본의 압력으로 더 이상 임정식구들을 조계지 안에 둘 수가 없었다. 그 후 임시정부가 충칭에 마지막 터를 잡을 때까지 27년간의 피난길을 헤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사드 여파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찾는 관광객이 줄었다고 한다. 1926년에 자리 잡은 바로 그 터 보경리 4호에 다행히 임시정부기념관이 복원되어 임시정부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03. 최초의 임시정부 청사인 화이하이중루의 1호 청사 ⓒ독립기념관 04. 이봉창이 거사 전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는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5. 윤봉길이 거사 직전 자필절명사를 들고 찍은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6. 현재 보경리 4호에 자리 잡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독립기념관

글. 문영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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