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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울돌목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 영화 <명량>과 <노량>으로 본 우리 유산
작성일
2024-03-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04

울돌목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영화 <명량>과 <노량>으로 본 우리 유산 한국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2014년 개봉된 <명량>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허풍이 난무하는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각색이 이루어졌어도 <명량>에서 연출한 1597년 10월 26일의 명량 해전은 엄연한 역사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참패한 일본에서 남긴 사료도 부지기수다. 창작이었다면 너무 뻔한 영웅담이라며 비난받았을 정도의 이야기가 놀랍게도 실제로 있었다. 01.명량 포스터

우리에게만 유리한 장소는 아니었다

영화 포스터에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라는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 수군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을 전투에 투입했다. 장계 작성 후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1척의 판옥선을 몰고 왔고 초탐선이 1~2인승의 나룻배이므로 이들을 모두 합해도 사실 전력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반면 왜군의 규모는 자료마다 차이가 큰 편이다.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에는 133척, 징비록에는 200척, 충무공의 조카인 이분이 저술한 행록에는 333척, 연려실기술에는 500~600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신빙성이 높은 난중일기와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비교하면 130여 척이 투입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하지만 최소 규모를 인용해도 조선 수군의 10배가 될 만큼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도 조선 수군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순식간에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꾸었을 만큼 명량해전의 의의는 엄청나다. 단지 전술적인 측면만으로도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 이 전투에 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홈코트의 이점을 가장 큰 이유로 들지만, 무엇보다 지도자의 굳은 의지와 이를 따르는 부하들의 믿음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의지와 믿음이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증거가 바로 해전의 이름이기도 한 ‘울돌목’이다.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에 위치한 좁은 수로인 울돌목은 명량(鳴梁), 즉 ‘물이 우는 소리를 내는 길목’이라는 뜻이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 굉음이 날 정도로 조류가 빠르게 흘러 지금도 소형 선박은 오가기가 어렵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충무공은 이곳에서 거대한 왜 함대를 궤멸시켜 버렸다.


때문에 충무공의 묘책과 반대로 울돌목이라는 함정에 빠져든 왜 수군의 한심함이 어우러져 대승을 거둔 것으로 아는 이가 많다. 하지만 이는 정답이 아니다. 아무리 홈코트여도 조선 수군 또한 울돌목에서 항해하기는 어렵다. 반면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막다른 곳에 몰아넣고 자멸하도록 만들었을 만큼 왜 수군도 한국의 지형지물을 이용할 줄 알았다.


02.18세기 일본 소설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에 묘사된 명량해전. 이처럼 충무공의 놀라운 승리는 일본도 인정하는 역사다. 03.물살이 회오리치며 흐를 정도로 조류가 빠른 울돌목은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해전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용기가 진정한 승리를 이끌었다

일단 일본이 섬나라고 대규모 침공군이 바다를 건너온 사실만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왜 수군은 능력이 뛰어났다. 거기에다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같은 사령관은 물론이고 명량해전의 현장 지휘관이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은 일본 전국시대 당시에 거친 세토 내해 일대에서 활약했던 이들이다. 특히 근거지인 에히메현은 구루시마해협처럼 울돌목과 비슷한 수준의 급류가 흐르는 곳이 부지기수다.


다시 말해 왜 수군에게 울돌목 같은 환경이 낯설지 않았고 조선 수군도 이곳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에 언급한 구키 요시타카가 1578년 제2차 기즈가와구치 해전에서 6척의 철갑선으로 적선 600척과 싸워 이긴 경험이 있었기에 압도적인 수적 우위가 무조건 승리를 담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상대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준 이순신이었기에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근접전에서 강한 왜군의 장점을 정확히 알고 사거리가 긴 함포로 원거리에서 적함을 정확히 타격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당시 수하들은 칠천량해전에서 지옥을 경험했기에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사기가 떨어진, 한마디로 공황상태였다. 지휘관 중 무신인 배덕문(1551-1599) 같은 이는 탈영할 정도였고 조정도 수군을 폐지해서 육군에 병합하려고 했을 만큼 비관적으로 예상했다.


나중에 ‘하늘이 도왔다’고 술회했을 만큼 이순신도 승리를 장담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수적 열세마저 심각했기에 정면으로 싸우려면 지휘관의 뛰어난 지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투 전까지 바닥까지 떨어진 군의 사기를 진작하는 데 주력했다. 두려움에 떨면서 진격을 주저하는 김응함과 안위에게는 엄히 처단하겠다고 경고함과 동시에 함께 공을 세우자고 독려했다.


이처럼 채찍과 당근을 함께 사용하면서 함대를 이끌었다. 대장선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가 왜선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면서 모범을 보이자 뒤에서 머뭇대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부하들도 용기를 내었다. 해전의 승패가 결정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반나절에 걸친 격전 끝에 왜군은 31척의 선박이 격침당하고 3,000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 후 도주했다. 엄청난 대승이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정신력의 승리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일본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이 저서인 <제국국방사론>에서 리더십과 인간성 그리고 성실함이 가히 비교 대상이 없다며 충무공을 극찬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거친 물살이 흐르는 울돌목은 그처럼 놀라운 지도자의 굳은 의지와 병사들의 믿음이 함께해서 기적을 만들어 낸 역사의 현장이자 증거다.




글. 남도현(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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