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교육, 공부의 바른 길을 찾다
작성일
2024-02-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92

교육, 공부의 바른 길을 찾다 01.유교 경서 《오경》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은 고대국가들이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해 가는 무렵에 도입됐다.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에 신라는 상대적으로 늦은 7세기 후반에 유교식 학교교육을 시작했는데 이후 유교식 학교교육은 조선 말까지 1,500년 넘게 지속됐다. 유교식 학교교육의 도입기인 고대 삼국시기의 교육은 ‘훈고사장학’ 중심이었다. 여기서 훈고사장학이란 고전의 해석과 암송에 중점을 두는 공부인 훈고학(訓詁學)과 시문의 작성과 수사적 기교를 중시하는 공부인 사장학(詞章學)을 합친 용어로, 중국에서 송나라 때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새로운 유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유행했던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문선》: 훈고사장학 시대의 핵심 교재

훈고사장학 시대의 교육이 무엇을 중시했는지는 고구려의 민간 교육기관인 경당에 관한 중국 역사서(《구당서》, 《신당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 당시 경당의 독서 교재로는 유교 경서인 《오경》(시·서·역·예·춘추)과 중국의 여러 역사서(《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춘추》) 그리고 양나라의 태자 소통(蕭統, 501-531)이 진·한 이래 이름난 문장가와 시인들의 시문을 골라 편찬한 《문선》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경당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책은 단연 《문선》이었다. 


고구려인이 이 책을 특별히 아낀 이유는 《문선》에 실린 문학 작품이 지닌 심미적·윤리적 기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점점 그 중요성이 커가던 외교문서의 작성과 문서행정의 수행에 필요한 문필 능력을 기르는 데 《문선》에 실린 다양한 글이 도움을 주었던 점또한 빼놓을 수 없다. 고구려의 경당에서 중시되었던 《문선》은 그 뒤로도 통일신라 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교재로 사용됐다.


02.《문선》의 저자 소명태자 03.훈고사장학적 인재의 표본인 고운 최치원 영정

강수와 최치원: 훈고사장학 시대 인재의 표본

훈고사장학 시대의 교육에서 기르고자 했던 대표적인 인재상은 강수(强首)와 최치원(崔致遠, 857~?)의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삼국통일 전후 시기에 살았던 강수는 흔히 신라 최초의 유학자로 불린다.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났던 그는 어려서 스승을 따라 《효경》, 《곡례》, 《이아》, 《문선》을 읽고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됐다. 


이후 강수는 관직에 나아가 당 황제가 신라에 보낸 조서를 해석하고 또 당 황제의 조서에 답하는 표문을 작성하는 등 외교문서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여 사찬(제8관등)의 지위에 올랐다. 신라 하대에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 여러 육두품 출신 젊은이들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과거에 등제하여 당에서 벼슬을 하거나 귀국 후 중앙 관료가 됐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사람은 최치원이었다.


최치원은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당나라의 빈공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그런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나 귀국 후 신라에서 활약할 때 주로 문한(文翰) 업무에 종사했고, 또 그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강수와 마찬가지로 문장화국(文章華國), 즉 문장으로 나라를 빛내는 전형적인 훈고사장학적 인재였던 것이다.


04.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초상 05.성학십도 Ⓒ국립고궁박물관 06.성학집요 Ⓒ국립고궁박물관

성리학의 도입과 교육의 변화

고려 말인 1290년(충렬왕 16)에 안향(安珦, 1243~1306)이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 즉 주자학을 도입하면서 한국 전통사회의 교육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은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가 북송 5자, 즉 주돈이(1017-1073), 장재(1020-1077), 소옹(1011-1077), 정호(1032-1085), 정이(1033-1107)의 학술과 사상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새로운 유학으로, 이전의 훈고사장학과 달리 우주론(존재론), 심성론(인성론), 수양론(공부론)의 체계를 갖춘 철학적 유학이었다. 


이 철학적 유학의 성립과 함께 성리학자들은 “사람은 누구나 성인(聖人)에 이를 수 있고, 군자의 공부는 반드시 성인에 이르고 나서 끝나는 것이다”라며, 학위성인(學爲聖人), 즉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인 성학(聖學)을 교육의 새로운 이상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은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는 과거 공부와 같이 남에게 인정받아 성공하는 데 급급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자신의 내면의 완성을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 말에 시작된 한국 전통사회 교육의 성리학적 전환은 조선 개국 이후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시대에 이르러 완결됐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마음으로 터득해 몸소 실천하기를 힘쓰지 않고, 거짓으로 꾸미고 외형을 좇아서 명성이나 칭찬을 구하는 위인지학이 아니라 도리(道理)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삼고, 덕행(德行)을 마땅히 실천해야 할 것으로 삼아, 먼 것보다 가까운 데서, 겉보다 속부터 시작해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소 실천하기를 기약하는 위기지학에 힘쓸 것1)을 강조했다. 


율곡 또한 “배우는 자는 먼저 뜻을 세워 도(道)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하며…칭찬과 비난, 영예와 치욕, 이익과 손해, 재앙과 복, 이런 것들이 결코 마음을 흔들지 못하게 하고, 분발하고 채찍질하여 반드시 성인(聖人)이 된 뒤에 그쳐야만 한다2)”라고 말했다. 성리학 시대의 교육은 내면의 완성을 위한 공부, 성인이라는 이상적 인격을 실현하는 공부가 목적이 되어야 함을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이 꿈꾸었던 공부의 바른길은 두 성리학자의 대표작인 《성학십도》(1568년)와 《성학집요》(1575년)에 잘 나타나 있다.


1) 《퇴계집》, 언행록1, 유편, 교인(敎人)
2) 《학교모범》 제1조 입지(立志)


07.독서하는 여인, 윤덕희(1685-1766) Ⓒ서울대학교박물관

성리학 시대의 여성교육

율곡은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3)”라고 했다. 인간은 교육적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여성교육 상황을 보면, 양반 사대부 남성에 비해서는 분명 그 범위와 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서는 훨씬 나아진 측면도 있었다. 여성교육이 그 집안의 가풍이나 부형의 성향에 좌우되었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상당수의 여성은 한글뿐만 아니라 한자·한문도 배웠고,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과 강정일당(姜精一堂, 1772-1832)같이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익혀 남성 못지않은 높은 학식을 갖춘 여성도 등장하였다.


강정일당은 “비록 부인들이라도 능히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면 또한 가히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기도 하였다(《정일당유고》).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여전히 글공부는 여성이 할 일이 아니라는 편견이 강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조차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요, 부녀자는 절서(節序)에 따라 조석으로 의복·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라며 여성이 할 일을 가사에 한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언문으로 번역한 이야기책을 탐독하여 가사를 방치하거나 여자가 할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심지어 돈을 주고 빌려보는 등 거기에 취미를 붙여 가산을 파탄하는 자까지 있다4)”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많은 여성들은 글을 읽었고, 자의식을 키워 나갔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차별없이 교육받는 시대는 그렇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3) 《율곡전서》 권27, 격몽요결, 서문
4)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 권30, 사소절, 부의(婦儀)2권




글. 박종배(동국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한국교육사학회장)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