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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편에 담긴 서사, 그 상흔을 치유하는 예술혼
작성일
2015-12-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194

파편에 담긴 서사, 그 상흔을 치유하는 예술혼 도자기 작가 이수경 부암동은 초행初行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다 있었나, 싶게 아늑한 분위기의 동네였다. 거리 구석구석 아기자기한 갤러리와 카페들이 있고 담벼락을 따라 이름 없는 들꽃들이 다소곳이 피어있었다. “골목 안쪽으로 50미터쯤 오시면 검은 철문 있는 집이에요.” 참 오랜만에 걸어보는 골목다운 골목길, 이수경 작가의 작업실도 그런 동네의 자연스러움을 닮아있었다. 삐걱, 철문을 밀고 들어선 작업실. 만추의 그윽한 풍경이 드리워진 커다란 창가에 그녀가 서있었다. 01. 정겨운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이수경 작가의 작업실. 만추의 그윽한 풍경이 드리워진 커다란 창가에 그녀가 서있다. ⓒ김병구

 

파멸의 순간, 생성된 의미

‘깨진 도자기 작가’로 불리는 그는 버려진 도자기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번역된 도자기(Translated Vases)> 시리즈로 국내외 화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번역된 도자기>는 2001년 이탈리아 알비솔라의 세라믹 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알비솔라의 도공인 안나 마리아Anna Maria에게 도자기에 관한 설화와 백자를 묘사한 김상옥의 시「백자부白磁賦」를 바탕으로 18세기 조선백자 12점을 상상하여 재현하도록 했다. 조선백자는 도자기에서 텍스트로 탈물질화되고 변형되고 다시 물질화되어 12개의 도자기로 재현됐다. 흰 바탕에 파란 색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였다. 조선백자라기 보다는 다소 중국적인 느낌을 준다고 할까. 편향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방증하는 듯 했다.

“이탈리아 전시를 마치고 돌아와서 전통방식으로 조선백자를 재현하는 항산 임항택 명장의 작업장을 방문하게 됐어요. 그날 항산선생님이 가마에서 도자기를 꺼내 하나씩 확인하고 거의 70%를 깨버리는 걸 목격했죠.” 도자 명인들은 18세기 조선시대의 제작 방법으로 장작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다. 불 떼는 작업은 날씨나 장작의 상태에 따라 민감한 것이라서, 도자기가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일정하게 나오지 않는다. 장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명작에 이르지 못한 도자기들을 모두 깨 버린다. 그렇게 처참히 버려진 도자파편들이 그녀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다시 의미 있게 태어났을 때 위로를 받아요. 제 작품도 버려지고 상처받은 존재가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이죠.” <번역된 도자기> 연작의 출발은 다른 문화에 대한 오해 즉, ‘번역’의 문제를 다루려는 의도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작품에 의도나 주제를 투영하려고 하기보다, 도자 파편들을 어루만지는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02. <번역된 도자기>는 2001년 이탈리아 알비솔라의 세라믹 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알비솔라의 도공에게 도자기에 관한 설화와 김상옥의 시 「백자부(白磁賦)」를 바탕으로 18세기 조선백자 12점을 상상하여 재현하도록 했다. ⓒ이수경

 

파편 속의 이야기

먼저 도자 파편들을 색깔과 크기 별로 분류한다. 건물 외벽에 돌을 붙일 때 쓰는 석재 에폭시를 도자기 내부에 여러 겹 바른다. 형태를 만들고 나면 도자기 틈을 또 다른 종류의 에폭시로 메꾼다. 그런 다음 그 위에 금분을 세 번 바르고 다시 그 위에 금박을 붙인다. 마지막으로 카슈kashu로 세 번 코팅을 해서 금박을 보호한다. 이제 더 이상 연약한 도자기가 아니다.

그렇게 버려진 존재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매만지다 보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길게는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작업을 할 때어떤 특정한 형태로 만들려는 의도는 없어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주목할 뿐이죠. 처음엔 미리 스케치를 해놓고 원하는 형태를 만들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원하는 형태가 나오지 않아 계속 망쳤죠. 그땐 제 전두엽을 지나치게 활성화시켜서 완성작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미리 기가 막힐 만큼 완벽하게 시뮬레이션을 했었던 것 같아요. 지향하는 목표가 있으니 작업 과정은 단지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죠.” 처음엔 도자 파편 하나하나가 이미 고정된 형태를 갖고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실패를 거듭한 뒤, 이제 그녀는 ‘나’를 내려놓았다. <번역된도자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도자 파편 그 자체이다. “어쩌면 제가 이 작품을 만드는 재주는 개미나 벌의 솜씨보다 못한 것 같아요. 도자기는 먼지에서 출발합니다. 먼지였던 흙이 물로 이겨져서 형태로 빚어지고 두 번에 걸쳐 고온에서 구워지고 결국 전혀 다른물성을 얻게 되죠. 특히 조선백자나 고려청자를 모티브로 제작됐다가 깨짐을 당한 도자 파편에는 또 다양한 서사가 더해집니다. 그래서 전 이미 제가 감당 못할 엄청난 서사를 품고 있는 도자 파편으로 제작한 <번역된 도자기> 작품 앞에 창작자로 저를 앞세우지 못하겠어요. 이 작품은 저보다 훨씬 앞에 나아가 있으니까요.” 이수경 작가는 도자기 파편들 앞에 창작자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았다. 부수어진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조각난 상흔들을 쓰다듬어줄 뿐이다. 그것은 깨진 도자기를 치유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작가자신을 치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03. 도자 파편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이수경 작가.‘ 번역된 도자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도자 파편 그 자체이다. ⓒ김병구

 

재치 그리고 깊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맞는 매체가 있어요. 다행히 전 새로운 매체를 배우고 익히는데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작가로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절에 다양한 실험을 맘껏 할 수 있었던게 새로운 매체에 대해 두려움이 없도록 만들어준 것 같아요. 그 당시 많은 분들이 제 작업이 너무 산만하고 정체성이 불분명하 다고 했고 그런 식으로 하다간 작가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했죠. 그런데 이제는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것이 제 정체성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제 작업들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몸의기관들처럼 각각 연결되어 있는 듯해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의 숲에 서로 연결된 생명체들처럼 자라나고 증식하는 것 같습니다.”

04. 도자 파편들을 석재 에폭시로 붙여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금분을 세 번 바른 다음, 다시 그 위 에 금박을 붙인다. 마지막으로 카슈(kashu)로 세 번 코팅을 해서 금박을 보호한다. ⓒ김병구 05.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들이 작업실 곳곳에 놓여있다. ⓒ김병구 06. 2014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교감’ 전시에 소개됐던 <달의 이 면>. ⓒ이수경

 

이수경 작가는 <번역된 도자기> 외에도 회화, 영상 등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작업들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다. 붉은 색 안료인 경면 주사鏡面朱砂로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그린 <경면주사 드로잉>, <전생역행 그림>이라 불리는 회화 시리즈, 부처나 보살의 뒷모습을 그려병풍으로 만든 <이동식 사원> 등 전통을 새롭게 바라보고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작업들을 다채롭게 펼치고 있다. 2014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교감’ 전시에 소개됐던 <달의 이면>은 특히 기억에 남는작품이다. 도자기 파편 작품이긴 하지만 조선백자를 소재로 했던 기존 작품들과 달리 함경북도 회령지역에서 생산된 흑유도자기 조각들을 썼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긴 여정을 지나 도착한 흑유파편을 손에 들고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면서 여러 상상을 펼쳐봤습니다. 그 옛날 항아리였을 사물을 통해 당시의 일상을 상상하면서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또한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달의 이면>이라는 제목은 여러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달의 이면을 볼 수 없어요.” 그녀의 작품들은 독창적인 발상과 특유의 위트가 부각된다. 그러나 가볍지 않다. 종교에 대한 사유, 전통의 재해석 같은 진중한 이야기가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들은 유독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마도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연민이 생기는 건 아닐까요. 붉게 물든 노을이나 한철 피는 꽃들이 아름다운 것도 곧 사라지기 때문이겠죠. 제 작업의 어떤 부분들에는 그런 사라지는 것들, 그 소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요한 탐착이 있어요. 전통이든 현대든 지독하게 아름다운 것은 누구에 의해서든 보존되리라 봅니다. 제 작품에도 그런 아름다움이 스며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이수경 작가에게선 예술가로서의 고집이나 예민함보다는 온유함이나 너그러움이 느껴졌다. 사라져가는 것, 상처받은 존재에 대한 그녀의 진심어린 애정이 전해졌다. 날카로운 도자 조각으로 만든 <번역된 도자기>가 온유하고 아늑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06.2014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교감'전시에 소개됐던 <달의 이면>. ⓒ이수경

 

글. 성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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