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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태화배’에 담긴 이야기: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다
작성일
2024-03-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42

‘태화배’에 담긴 이야기: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다 만개한 꽃의 모습을 본뜬 백자잔 한가운데 ‘태화배(太和盃)’라는 푸른색 글씨가 쓰였다. ‘태화(太和)’는 심수경1)(沈守慶, 1516~1599)의 문집 『견한잡록(遣閑雜錄)』에 기록된 시(詩)에도 등장한다. “술의 덕이 참으로 칭송할만하며 큰 취기는 화평스럽게 한다(酒德眞堪頌 醺醺養太和)”라는 시구처럼 ‘태화배’에는 화합과 평안을 추구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조선 사대부의 마음이 담겨 있다. 00.도 01.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白瓷靑畵 ‘太和盃’銘花形盞)>, 조선 16세기, 높이 4.2㎝, 입지름 13.8㎝, 서울 중구 장교동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한양에서 출토되는 조선 전기 청화백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태화배’명화형잔>(도 01)은 1972년 서울 중구 장교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한다.2) 장교동은 도성(都城) 안의 큰 다리인 장통교(長通橋)가 있던 곳으로 이 일대에서 한양의 다양한 재화(財貨)가 활발히 소비됐다. 장교동과 가까운 인현동에서 ‘太和盃’가 쓰인 백자잔(도 02)이 출토된 사실도 흥미롭다.3) 이러한 사례는 한양의 사대문 안에서 당시 고급품이자 사치품인 청화백자가 소비되었던 정황을 보여준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특별한 용도에 맞추어 매우 드물게 제작됐고 현재 극히 적은 수량만 남아있다. 그러하기에 서울 한복판에서 출토된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에 담긴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

조선시대 왕실과 관청 소용의 백자는 왕의 수라와 궁궐의 식사를 담당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인 관요에서 제작됐다. 관요는 1467년(세조 13) 무렵 경기 광주에 설치된 이후 왕실 수요에 따라 우수한 품질의 백자를 제작하면서 조선시대 백자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장교동에서 출토된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 은 단아한 꽃의 형태를 본떠 관요에서 제작된 술잔이다.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꽃잎 모양을 표현하고 술이 담기는 바닥에는 ‘태화배’라 적었다. 백자잔의 내·외면과 굽을 정교하게 깎아냈으며, 푸른빛이 감도는 백색 유약을 전면에 씌워 정성스레 구웠다.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의 솜씨로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은 청화백자와 달리 담백한 기품을 드러내며 조선 전기 관요에서 제작된 청화백자의 단아한 면모를 보여준다.


1) 심수경: 조선 초기~중기 문신이자 서예가로 청백리에 녹선됐으며, 좌의정을 지낸 문신.
2)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과 중국에서 수입된 명대(明代) 청화백자 3점도 함께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국도자』(2007), pp. 310~311.
3)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세운 재정비촉진지구(6-2-8구역) 유적』(2020), p. 73.


01.도 02.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편(白瓷靑畵‘太和盃’銘花形盞片)>, 조선 16세기, 높이 4.5cm, 추정 입지름 14.0cm, 서울 중구 인현동 출토 Ⓒ한성백제박물관  02.도 03. <백자청화‘太和’명화형잔편(白瓷靑畵‘太和’銘花形盞片)>, 1572년 전후, 높이 4.5cm, 추정 입지름 14.0cm, 경기 광주 곤지암리 3호 가마터 출토 Ⓒ경기도자박물관

도자기 파편에 담긴 실마리

현재 경기 광주에는 350여 곳에 이르는 관요 가마터가 산재하고 있다. 가마 운영에 필요한 땔나무가 무성한 곳을 따라 이동하며 그릇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관요 가마터에는 당시 제작되었던 다양한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는데, 도자기 파편을 통해 가마의 운영 시기를 파악하고 당시 백자 제작에 반영된 사회적·문화적 양상 등 여러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기에 관요 가마터 가운데 곤지암리 3호 가마터에서 출토된 <백자청화‘太和’명화형잔>(도 3)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백자잔의 기형과 명문의 형태, 시문 기법이 앞서 소개한 두 점의 백자잔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곤지암리 3호 가마는 16세기 후반에 운영된 가마이므로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은 16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관요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귀한 청화백자를 사용했던 사람들

관요에서 제작된 고급 청화백자는 왕실에만 허용되었으나 일부 관료들이 사사롭게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조정의 엄격한 금제(禁制) 조치에도 불구하고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는 사대부를 비롯하여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높은 수요를 보였다. 특히 값비싼 청화 안료로 문양을 장식한 청화백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모두가 소유하기를 갈망한 귀한 물건이었다.


그 당시 청화백자를 사용할 수 있었던 지배층은 그들의 정취(情趣)를 청화백자 제작에 투영한듯하다. 술을 소재로 삼은 시를 장식한 청화백자의 존재가 그 증거이다. <백자청화‘太和盃’명화형잔>을 사용한 이들은 술잔에 ‘태화배’를 적어 거나하게 취하면서도 세상의 화평을 기원하는 아취(雅趣)를 누렸다. 태화배에 담긴 이야기는 술 한 잔에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인간의 소망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음을 소리 없이 들려주고 있다.


4)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보고서』(2019), p. 226.




글. 김미소(김포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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