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융릉과 효도 단상
- 작성일
- 2015-10-01
- 작성자
- 문화재청
- 조회수
- 2180
정치처럼 비정한 건 없다는 말을 우린 쉬이 듣는다. 이런 주장의 함축적 상징이 바로 비운의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아닐까 싶다. 그는 영조(英祖, 1694∼1776)의 아들로 태어나 차기의 국왕을 예약한 세자의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서슬 퍼런 명령으로 말미암아 꽃다운 나이 27세 때 죽음을 맞이한다. 한데 그 최후가 참으로 끔찍하였다. 그건 바로 자연사가 아니라 뒤주에 갇혀서 죽은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이요, 자는 윤관允寬, 그리고 호는 의재毅齋다. 영조는 정성왕후와 정순왕후 등 왕비 2명과 정빈 이씨 귀인 조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는데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 첫 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겨우 아홉 살로 요절했다.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다. 그러니 그 얼마나 애지중지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을 그처럼 참혹하게 죽인 건 대체 왜였을까? 사도세자는 무인적인 기질이 강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학문과는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래서 아버지 영조는 아들을 꾸짖는 일이 잦아졌다. 대저 부자 사이는 사랑과 칭찬이 관건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리거나 심지어는 반목의 갈등까지를 야기하기에 이른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꼭 그런 케이스이지 싶었다. 사도세자가 아버지를 꺼리게 되면서 둘 사이는 더욱 심한 갈등이 순환되고 증폭되어 결국엔 의대증衣帶症이라는 병까지 얻는다. 이는 혜경궁 홍씨가 지적한 것으로, 그 증상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이라 했다. 즉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아예 입지 않으려고 했다는 얘기다. 병이 깊어진 사도세자는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까지를 죽였다고 한다. 이에 영조가 크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고 하니 부자간의 첨예한 갈등이 바로 곁에서 보이는 듯 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의 산책로는 융릉을 찾은 이들에게 몸과 마음의 치유를 선사했다. 하지만 건조기 산불예방을 위해 해마다 12월 1일부터 다음해 5월 15일까지는 산림 산책로를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니 참고하고 볼 일이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김씨를 합장한 무덤인 건릉健陵까지를 보고 오려 했으나 짧은 해는 이를 다음으로 연기하라고 했다. 융릉을 나오자 아들은 지척의 갈빗집으로 우리 부부를 데리고 갔다. 갈빗집은 2층의 계단으로 우뚝했다. 작년에 허리수술을 받은 까닭에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아내다. 그러나 걱정 없었다. 자타공인 효자인 아들은 자신의 집구경을 시켜줄 때처럼 이번에도 아내, 아니 자신의 어머니를 훌쩍 업었다. “수원갈비는 역시 맛있네!”를 연발하는 아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이 카네이션 꽃보다 더 고와보였다. 사도세자가 영조 임금의 눈에 오로지 진정한 효도만 보였던들 그는 분명 그처럼 허무하게 가진 않았으련만….
글·사진. 홍경석 (대전광역시 서구 문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