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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순일곱에 관악산을 오른 채제공
작성일
2019-04-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361

예순일곱에 관악산을 오른 채제공 「유관악산기」 채제공(蔡濟恭)은 1786년 음력 4월 13일 관악산을 올랐다. 환갑을 넘긴 나이 벼슬살이의 영예를 족히 누렸다고 하겠지만, 한때 정조의 최측근이었다가 실각한 홍국영(洪國榮)을 지지한 혐의로 거듭 탄핵을 받았다. 이 무렵 채제공은 노량진에 정치와(靜治窩)라는 이름의 조그만 집을 짓고 기거했는데 일어서면 머리가 서까래를 치고, 앉으면 이웃집 담장이 마당 앞을 막고 섰다. 강이 가까이 있지만 막혀 있고 산 한 자락만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초라한 집이었다. 그러나 조용함으로 더위를 다스린다는 뜻에서 그 집을 정치와라 하였다. 날씨보다 정치의 뜨거움을 조용함으로 피한다는 뜻이었으리라. 채제공은 이러한 우울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관악산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언덕 위에 철쭉꽃이 막 피어, 바람이 불면 그윽한 향기가 때때로 물을 건너 이른다. 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원하여 멀리 떠나온 흥취가 인다.

뭇 시인과 묵객(墨客)이 머물던 자하동(紫霞洞)

1872년 시흥현 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를 보면 채제공은 원지원(遠之牧, 지금의 상도동), 우와피(牛臥皮, 보라매병원 입구)를 지나, 신림리(新林里)를 거쳐 자하동(紫霞洞)으로 들어갔다.


10리쯤 가서 자하동으로 들어갔다. 일간정(一間亭)에 올라 쉬는데 정자는 신씨(申氏)의 전장이다. 계곡물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데 숲이 뒤덮고 있어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물길이 정자 아래 이르러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날리는 것은 포말이 되고 고이는 것은 푸른빛을 이루다가 넘실넘실 흘러 골짜기 입구를 에워싸고 멀리 떠나간다. 흰 명주를 깔아놓은 듯하다. 언덕 위에 철쭉꽃이 막 피어, 바람이 불면 그윽한 향기가 때때로 물을 건너 이른다. 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원하여 멀리 떠나온 흥취가 인다.


자하동은 지금의 서울대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19세기 시서화(詩書畵)에 일가를 이룬 신위(申緯)의 호 자하(紫霞)가 여기서 나왔다. 이 집안의 별서가 서울대 대운동장 자리에 있었는데 신위는 노년에 이곳에 거처하면서 관악산 북쪽의 암자에서 낙엽을 쓰는 승려라는 뜻의 북선원소낙엽두타(北禪院掃落葉頭陀)라 자칭하였다. 신위의 선조 중에 신여석(申汝晳)과 신여철(申汝哲) 형제가 있었는데 임진란 때 배수진을 치고 장렬하게 전사한 신립(申砬)의 증손이다. 이들 형제는 개울가에 몇 칸 집을 짓고 함께 늙어갈 집 이로당(二老堂)과 노년에 와서야 산수간에 물러나 살아야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 만오정(晩悟亭)을 지었다. 이들 형제와 친분이 있던 최석정(崔錫鼎)은 이로당의 기문을 지어 “비단 같은 봄꽃이며 그림 같은 가을 단풍, 여름이면 옥을 뿜는 폭포, 겨울이면 온통 하얗게 쌓인 눈과 얼음, 저물녘의 안개와 가랑비, 새 울음소리에 노니는 물고기, 이들 어느 하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슬픔을 풀어줄 거리가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저물녘의 안개와 가랑비, 새 울음소리에 노니는 물고기, 이들 어느 하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슬픔을 풀어줄 거리가 아닌 것이 없다.

이들 형제는 이로당 곁 개울 상류에 일간정을 지었는데 관악산야외식물원과 서울대 사이에 있었다. 채제공이 이르렀을 때 관악산에서 내려온 물이 바위에 부딪혀 포말을 날리고 명주처럼 맑고 푸른 물이 흘러가는데 언덕에는 철쭉꽃이 피어 향기를 뿜고 있었다. 서영보(徐榮輔)도 채제공이 관악산을 오른 바로 그해 신위와 함께 자하동을 찾았는데 “개울 동북쪽 꺾인 곳에 임해 있어 서남으로 개울물이 막 흘러나가는 것을 내려다본다. 연주대에서 정자 동쪽에 이르러 복류하던 실개울이 아래로 떨어져 작은 폭포가 된다. 그 곁에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 새겨놓은 글씨가 있다. 물이 정자 터를 돌아 굽이굽이 이어져 내려 층층 소리 내어 떨어지고 부딪혀 울다가 다시 빙 돌아 꺾어 정자 서쪽에 이르면 고여서 작은 소가 된다. 맑아서 털끝 하나도 비칠 만하다. 달빛이 일렁거리면서 옆에서 비추면 처마가 흔들흔들 마치 수은이 형체 없이 흘러내리는 듯하다.”라 한 바 있다. 채제공보다 10년 뒤인 1796년 정수영(鄭遂榮)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개울가 첩첩의 너럭바위 위에 일간정이 보인다.

01. 팔봉능선은 채제공 일행이 길을 잃어 우왕좌왕하다가 젊은 이숙현 이 먼저 불성암으로 올라가 그곳 승려의 인도를 받았던 곳이다. 02. 보물 제1477-2호 채제공 초상.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이다. ⓒ문화재청 03. 채제공보다 10년 뒤인 1796년 정수영(鄭遂榮)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개울가 첩첩의 너럭바위 위에 일간정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 풍경에 드리운 사색

정자를 경유하여 다시 10리쯤 갔다. 길이 험해서 말을 탈 수 없었다. 여기서 말과 마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서 넝쿨을 뚫고 골짜기를 지났다.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자가 절이 어딘지 잃어버렸다. 동서남북도 알 수 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 벌써 얼마 남지 않았다. 길에 나무꾼이 없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하인들도 어떤 놈은 앉고 어떤 놈은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이숙현(李叔賢, 이름은 廣國)이 날듯이 끊어진 낭떠러지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리저리 번쩍번쩍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노라니 한편으로 괴이하고 한편으로 괘씸했다. 조금 있으니 흰 중옷을 입은 사람 너덧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하인들이 모두 소리 지르고 기뻐하며 스님이 왔다고 하였다. 이숙현이 멀리서 절을 보고 먼저 가서 승려들에게 우리 일행이 여기에 있다고 직접 고했던 것이다. 이에 승려의 인도를 받아 대략 4~5리쯤 떨어져 있는 절에 이르렀다. 절 이름은 불성암(佛性菴)인데 삼면이 봉우리에 둘러쳐 있고 한 면만 막힌 데 없이 트였다. 문을 열면 앉으나 누우나 천리 먼 곳까지 눈길을 보낼 수 있다.


채제공은 일간정을 경유하여 불성암(지금의 불성사)으로 향했다. 요즘은 수중동산에서 동쪽으로 가면 바로 연주대에 오를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연주대 남쪽 팔봉능선을 거쳐 불성암에 이른 다음 다시 북으로 깔딱고개를 넘어 연주대로 갔다. 채제공 일행은 팔봉능선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젊은 이숙현이 먼저 불성암으로 올라가 그곳 승려의 인도를 받은 에피소드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천지신명의 힘을 입어 내 나이 여든셋이 된다면 남에게 둘러 업혀 오더라도 반드시 이 연주대에 다시 올라 옛사람의 발자취를 잇고 싶다.

채제공은 이튿날 해가 뜨기 전에 연주대로 향하였다. 승려들이 길이 험하여 갈 수 없다고 만류하였지만 채제공은 맹자(孟子)를 인용하여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다. 장수가 가는데 그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라 하고는 가파른 벼랑을 넘었다. 끊어진 길과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면 몸을 절벽에 바싹 붙이고 손으로 나무뿌리를 바꿔 잡으면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현기증이 나서 옆으로 눈길을 보낼 수가 없었다. 큰 바위가 길 가운데를 막고 있는 곳을 만나면 그나마 덜 뾰족한 바위 모서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오르내렸다. 고쟁이가 찢어져도 안타까워할 틈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곳을 여러 번 만난 다음에야 연주대 아래 이르렀다.

연주대 아래서 보니 먼저 온 사람들이 연주대(戀主臺) 만 길 절벽 위에 서서 몸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흔들흔들 마치 떨어질 듯하였다. 채제공은 모골이 송연하여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하인을 시켜 “그만 두시오, 그만 두시오”, 고함을 치게 하였다. 그러고는 연주대 정상의 차일암(遮日巖)에 올랐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아우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관악산에 머물 때, 가끔 이곳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뜨거워 작은 천막을 쳤는데 귀퉁이에 오목한 구멍 넷이 당시까지 뚜렷하였다. 채제공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연주대와 햇살을 막는 차일암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채제공은 정상에서 서해를 바라보고 북쪽으로 대궐을 바라보았다. 소나무와 전나무만 빼곡한 경복궁의 옛터를 보고 양녕대군이 임금을 그리워한 뜻을 돌이켰다. 그리고 미인을 그리워하는 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외웠다.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정조대왕에 대한 그리움을 이렇게 대신하였다. 그런 다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83세의 나이에 신선처럼 가볍게 관악산을 오른 일을 떠올리고는 학문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야 괴이할 것이 없지만 그보다 훨씬 어린 67세에 기력이 쇠진한 것이 부끄럽다고 하였다. “천지신명의 힘을 입어 내 나이 여든셋이 된다면 남에게 둘러 업혀 오더라도 반드시 이 연주대에 다시 올라 옛사람의 발자취를 잇고 싶다.”는 염원으로 관악산 기행을 마쳤다. 불행히도 채제공은 여든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허목의 나이에 다시 관악산을 찾겠다는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04. 관악산 정상 부근의 불성사. 요즘은 수중동산에서 동쪽으로 가면 바로 연주대에 오를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연주대 남쪽 팔봉능선을 거쳐 불성암(지금의 불성사)에 이른 다음 다시 북으로 깔딱고개를 넘어 연주대로 갔다. 05.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아우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관악산에 머물 때, 가끔 연주대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06. 연주대 0.5km 전,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 07.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팔봉능선

글. 이종묵(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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