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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동주 시인의 북간도 항일교육의 성지, 명동촌
작성일
2019-07-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512

윤동주 시인의  북간도 항일교육의 성지,명동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2016년)에서 정지용 시인은 일본 유학을 앞두고 마음속 고뇌를 털어놓는 윤동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스승으로부터 한 가닥 위안을 얻고서도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치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청년 윤동주는 결국 1942년 4월 ‘히라누마 도오주’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하고 일본 도쿄의 릿쿄대에 입학했다. 온순하고 여린 성품의 청년이 당시 느꼈던 모욕감과 비애는 개명 직전에 쓴 시인 <참회록>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 영화 <동주>가 제대로 묘사했듯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대표적인 민족 시인인 윤동주(1917~1945)의 짧은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부끄러움’이었다. 윤동주는 항일 투쟁을 위해 독립운동에 전념한 동갑내기 사촌인 송몽규를 보면서 골방에 틀어박혀 시어(詩語)나 만지작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자책했다. 그러나 각자에게 부여된 사명과 걷는 길이 달랐을 뿐 일제의 탄압에 맞서 조국의 해방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동주도 몽규도 마찬가지였다. 01, 02.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 입구. 명동촌은 1899~1900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을 비롯해 재력 있고 학식 높은 유학자들이 낡고 부패한 조선을 벗어나 우리민족의 밝은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중국 땅에 모이면서 만든 마을이다. ⓒ독립기념관



동쪽을 밝히는 마을

대표작인 <서시>에 나오는 시구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원하고, 이런 염원을 주옥같은 시편에 담아냈던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여 뒤인 1943년 7월 사상범의 혐의를 뒤집어 쓰고 체포됐다. 2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옥사했다.


이렇게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민족의 아픔을 노래했던 윤동주는 북간도 지역인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서 태어났다. 현재 옌볜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룽징시의 ‘명동촌(明東村)’에 가면 윤동주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명동촌은 1899~1900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을 비롯해 재력 있고 학식 높은 유학자들이 낡고 부패한 조선을 벗어나 우리민족의 밝은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중국 땅에 모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명동(明東)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역시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는 의미였다.


03.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원하고, 이런 염원을 주옥같은 시편에 담아냈던 윤동주 ⓒ독립기념관 04. 정면에서 바라본 윤동주 생가 ⓒ독립기념관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으로 둔갑한 윤동주

하지만 막상 일본 제국주의에 뜨거운 예술혼으로 저항했던 민족 시인의 숨결을 느끼고자 했던 기대는 명동촌에 들어서는 순간 무참히 깨졌다. 생가 입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비석은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명동촌을 ‘옌볜조선족자치주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데, 지난 1994년 생가를 복원하면서 이런 문구를 비석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시인이 출생한 지역은 지린성이 맞지만, 역사적으로 한참 뒤에 만들어진 개념인 ‘조선족’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면서 마치 윤동주의 국적이 중국인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셈이다.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 일을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그림자가 문화·예술 분야까지 전방위로 뻗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섬뜩했다. 국내 역사학계와 문학계는 윤동주를 중국의 애국 시인으로 포장하는 것에 줄기차게 반발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체도 않고 있다.


‘타협의 길’ 대신 민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고난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걸출한 역사 인물을 배출한 명동학교

복잡한 심경을 안고 윤동주 생가를 빠져나와 천천히 몇 걸음을 옮기자 이내 기념관으로 새롭게 꾸민 명동학교 옛터가 나왔다. 명동학교는 윤동주의 외삼촌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약연(1868~1942)이 1908년 4월 건립한 교육 기관으로 윤동주·송몽규를 비롯해 문익환·나운규 등 역사 속의 걸출한 인물을 숱하게 배출했다. 1899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간도의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부락을 건설한 김약연은 1910년대와 1920년대 초 반일운동의 중심 기지였던 명동촌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인물로 ‘간도 대통령’이라고도 불린다.


윤동주는 이 명동학교에서 5년 동안 공부했다. 독립운동가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명동학교에서 조선의 역사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교육받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작품은 그저 순수 서정시로만 흘러갔을지 모른다. 이곳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며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시적인 슬픔으로 승화했기에 윤동주는 민족 시인으로 우리 문학사에 길이길이 남을 수 있었다.


05. 윤동주·송몽규를 비롯해 문익환·나운규 등 역사 속의 걸출한 인물을 숱하게 배출한 명동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6. 문익환 등 친구들과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윤동주(맨 우측) ⓒ위키백과

 <서시>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1930~40년대 발표된 <거리에서>와 <간판 없는 거리>, <흐르는 거리>를 보면 암흑의 시대에 윤동주가 얼마나 결연한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각각 북만주·한국·일본에 머물 당시 지어 진 이들 작품은 모두 어두운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밤거리를 시공간으로 하는 작품을 통해 고독과 방황을 강조하는 한편 일제 치하의 어두운 역사적 상황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라는 시에는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중략)/괴롬(괴로움)의 거리’라는 시구가 나온다. 1941년에 쓴 <간판 없는 거리>를 통해서는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집집마다 간판이 없어’라고 노래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전략으로 창씨개명과 함께 집집마다 모든 간판을 일본어로 바꿔야 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시에서 윤동주는 ‘손님들뿐’이라는 시구를 통해 주인 의식을 상실한 한국인의 상황을 가슴 아프게 드러냈다. ‘으스름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라는 시구를 담은 ‘흐르는 거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독자의 마음을 적신다.


07. 윤동주의 원고 원본 ⓒ위키백과 08. 명동촌 입구에서 바라본 명동교회 ⓒ독립기념관



윤동주 문학의 텃밭이 된 교회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산파 역할을 한 명동교회는 ‘명동역사전시관’으로 바뀌어 선조들이 남긴 자취를 더듬고 있다. 1909년 명동교회가설립되자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교회의 장로가 됐다. 집 바로 옆에 있는 명동교회는 소년 윤동주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교회를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윤동주는 신앙의 힘을 체득했다. 신앙을 통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너머를 바라보는 초월적 시선을 갖지 못했다면 윤동주의 시가 그토록 영롱하고 아름답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재 윤동주 생가를 관리하 고 있는 송길연(63) 전 명동촌장은 “일본군은 독립의지를 고취하는 명동학교에 세 차례나 불을 지를 정도로 이곳을 눈엣가시로 여겼다”며 “명동학교 졸업생의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시중학교에 편입한 윤동주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것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6개월 뒤 교토 도시샤대문학부로 전학했다.


물론 그가 일본으로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의 넉넉한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지주 자식들이 일반적으로 택했던 일본과의 ‘타협의 길’ 대신 민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고난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투쟁의 전면에서 일제에 맞선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도덕적 양심을 행동의 첫 번째 준거로 삼고 암흑의 시대를 헤쳐가고자 했다. 윤동주가 사상범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 역시 일제가 윤동주의 시에서 불온한 희망과 상상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글. 나윤석 (서울경제신문 문화레저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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