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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왕의 권위와 책임을 담고 있는 옛 문서, 교지敎旨
작성일
2012-08-14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317


고신告身, 어진 이를 높이고 곁에 두려 하다
관료에게 관직을 내리는 문서를 일반적으로 ‘교지’라 부르지만 ‘고신’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현대사회에서의 임명장과 같은 이 문서는 고려시대에는 제서制書라 불렀고,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 또는 관교官敎, 대한제국기에는 칙명勅命이라고 불렀다.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는 ‘사람쓰는 일[用人]’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임금으로서 천하를 편안히 다스리고 그 이름을 후대에까지 남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진 이를 높이고 스스로를 선비보다 낮추는 것이 도리라 여겼다. 『중용中庸』에는 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도리가 있으니, 그 가운데 ‘존현(尊賢, 어진 이를 높이다)’과 ‘경대신(敬大臣, 대신들을 공경하다)’ 그리고 ‘체군신(體群臣, 뭇신하를 내 몸같이 여기다)’이 있다고 하였다. ‘고신’은 바로 어진 이를 높이고자 했던 임금의 마음을 담은 문서이다.


문서의 서식 안에 담겨진 존중의 마음
고신은 문·무관 4품 이상과 5품 이하로 나누어 서로 다른 형식을 지니고 있다. 4품 이상은 ‘교지’로 발급되며 ‘敎旨(이름)爲(관계)(관직)者’의 형식으로 적어 넣고 연월 사이에 국새를 찍었다.

국새는 조선 초기에는 ‘조선왕보朝鮮王寶’를 사용하였고, 이후 ‘시명지보施命之寶’로 바뀌었다. 반면에 문무관 5품 이하는 낭계郎階라 하여 ‘교첩敎牒’으로 작성되었다. 왕명을 받아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급하였는데, ‘(모)曺(연호)(모년)(모월)(모일)奉 敎(具銜)1)(성명)爲(관계)(관직)者’의 형식으로 작성하였고 인장은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兵曹之印’을 찍었다. 그런데 고신을 기록하는 형식에서 옛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고신의 첫머리에 적혀 있는 ‘교지敎旨’는 임금을 상징하기에 본문보다 높게 적어 넣어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교첩’에서도 ‘임금의 명령을 받들었다’는 의미의 ‘봉교奉敎’를 예를 갖추어 기록하고 있다.

곧 ‘奉’자를 적은 후 행을 바꾸고, 또다시 본문보다도 칸을 높여 적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두법擡頭法’이라 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한 형식이다. 곧 옛 문서에서 공격空格, 피휘避諱와 함께 존중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니, 당시의 임금을 대하던 태도를 알 수 있다.



홍패紅牌와 백패白牌, 선비를 높이고 도道를 중하게 여기다
과거에 합격한 이에게 내리는 교지는 문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홍패와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내리는 백패로 구별되었다. 『태종실록』 권1에는 과거에 급제한 선비에게 홍패를 주는 것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하게 하여 영광스럽게 하고 특이하게 한 것’ 이라 하여 의醫·역譯·율律·음양陰陽 등의 과목에 합격한 이들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서에 쓰이는 도장도 일반 교지와는 다르게 ‘과거지보科擧之寶’를 사용하였으니, 인재를 뽑는 일에 대한 남다른 인식 때문이었다. 이 같은 엄정한 구분은 종이를 사용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곧 조선시대 왕실과 각 아문에서 쓰였던 물자를 항목별로 분류 정리한 『탁지준절度支準折』에는 문서에 사용된 종이를 상품과 하품의 도련지搗鍊紙, 초주지草注紙, 저주지楮注紙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홍패에는 상품도련지를 백패에는 하품도련지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큰 공을 치하하고 고인故人을 추모하다
교지 가운데 ‘사패賜牌’는 공이 있는 신하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려주거나, 공이 있는 향리에게 향리의 역役을 면제해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문서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 6월에 이순신을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공신忠仗義迪毅力宣武功臣’ 1등으로 책봉하였고, 10월에는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전하도록 하고 관작과 품계를 3자급資級씩 올려 그 공을 치하하였다. 그 사실이 「이순신 사패 교지」에 담겨 있다. 한편 ‘추증追贈’과 ‘시호諡號’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였다.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시호가 내려졌고, 비록 돌아가신 분이나 그 자손의 공에 따라 관작官爵을 올려 대우해주기도 하였다.

교지는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왕권을 상징하는 문서로서 ‘권위’만을 드러낸 문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천하를 편안히 다스리고 그 덕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어진 이를 관직에 두고, 공이 있으면 그 공을 치하하고자 한 ‘예禮’를 담은 문서였다. 또한 이순신 장군에게 사급하기로 약속했던 노비는 48년이 지난 뒤이지만 그 약속을 지킬 만큼 국가의 책임이 막중했음을 보여주는 문서이기도 했다. 옛 문서를 대할 때에 일차적으로는 종이의 질, 문서의 서식 등 외형적인 특징을 감정하여 진위眞僞를 판별하지만, 기록된 내용이 그 시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가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글·정제규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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