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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접경의 바다 너머 유장한 세월들 부산
작성일
2008-10-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538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며 제1의 항구도시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부산이 지금처럼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부산이 지금과 같은 도시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1876년 2월 부산항이 개항되면서부터다. 당시 일본은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정부에 끈질기게 압력을 넣어 부산항이 개항하게 되었다. 개항되기 이전 부산의 인구는 겨우 3,300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지금 부산의 심장부인 남포동과 광복동, 중앙동 일대가 모두 넘실거리는 바다였다니 부산은 그야말로 한가로운 갯마을이었던 것이다. 낙동강이 흘러드는 너른 땅이 왜 이처럼 한지로 남아 있었을까?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붙어있는 지정학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역시 일본 때문이다. 고려시대 후기인 13세기에는 왜구의 침탈이 극심했다. 전 해안자락마다 왜구의 피해가 컸는데 그중에서도 일본과 거리가 가까운 부산, 양산, 김해의 피해가 극심했다. 조선의 건국 뒤에도 왜구의 침탈이 잇따르자 태조는 동래현에 진을 설치하고 왜구를 막는 일에 힘을 쏟아 부었다. 이후 왜구의 침탈은 잦아들었고 대신 교역을 하러오는 일본의 배가 늘어났다. 이처럼 부산이 발전을 하지 못한 것도 일본 때문이고 발전을 하게 된 것도 일본 때문이니 부산과 일본은 아이러니한 애증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무덤 속에서 만나는 가야의 신비, 복천동 고분군

지금은 부산의 한 변방일 뿐이지만 동래구는 부산의 중심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때 이미 동래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해서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남쪽 끝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이곳은 부산에서 역사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동래읍성지, 동래향교, 동래부 동헌이 있으며 인근 금정산 자락에는 우리나라에 축조된 성곽 중 가장 큰 금정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동래구의 유적들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적 제273호로 지정된 복천동 고분군이다. 동래읍성지가 있는 대포산 자락,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한 복천동 고분군은 1969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져 1980년대부터 발굴에 들어갔는데 현재 조사된 고분 수만 해도 113기에 달한다. 이 수치는 부산과 가야문화권의 고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경주의 대형고분 다음으로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복천동 고분군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현재로서는 삼국시대 초기인 4세기경 신라에 합병되기 이전의 가야고분으로 알려져 있다. 복천동 고분은 그 양식이 다양해서 가야무덤의 구조와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무려 9,200여 점에 달하는데 철기류, 토기, 유리 장신구, 뼈로 만들어진 연장 등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말 투구는 철기문명을 배경으로 한 강력한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분군 지척에 자리한 복천박물관에서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명망있는 절집 범어사

동래 금정산 자락에 자리한 범어사는 부산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며 가장 명망있는 절집이다. <범어사 창건 사적>에는 범어사의 창건설화가 전해져 온다. 신라 흥덕왕 10년(835) 동남해안에 10만 여 척의 배를 거느린 왜구가 나타나 위협했다. 그때 왕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대사로 하여금 금정산에 가 기도하게 하면 왜구가 물러날 것이다.”라고 했다. 왕이 의상을 시켜 그대로 하게 했더니 과연 왜구가 물러났다. 이를 기리기 위해 범어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창건설화의 내력 때문일까? 범어사의 이력에는 이 땅을 침탈해온 일본과 맞서 싸운 기록이 많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의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으며 일제시대에는 범어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한용운과 함께 ‘범어사 학림의거’라는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전국에서 쓸 태극기를 모두 이곳에서 만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범어사가 부산에서 가장 명망있는 절집이 된 것은 오랜 역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라의 위기 때마다 등불을 밝혔던 호국의 의지 때문이리라. 보물 제1461호로 지정된 범어사 일주문은 네 개의 튼실한 기둥에 웅장한 다포지붕을 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당당해보여 범어사의 이력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세만큼이나 그윽한 대찰의 풍모 양산 통도사

부산으로 드는 관문인 양산 땅. 낙동정맥이 바다를 향해 마지막 힘을 쏟아붓는 영취산(1,059m) 기슭에 대찰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다. 통도通道. 이름만 들어도 범상치 않은데 일주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 문간을 넘어서면서 대찰의 위용이 과연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로전과 중로전, 하로전, 세 군데의 영역에 빼곡히 들어선 전각들. 목조건축의 시대별 양식을 모두 섭렵한, 말 그대로 사찰전각 박물관이다. 전각들의 위용은 불이문을 넘어 금강계단 앞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丁자 형의 독특한 외관에다 연꽃이 조각된 소맷돌과 고풍스러운 문창살, 그 너머엔 다시 화려한 석문과 석조담장으로 둘러쌓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탑이 놓여져 있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시절,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이 당나라에 있는 청량산에 들어가 매일 기도를 하는데 어느 날 문수보살이 나타나 석가여래가 입었던 가사와 진신사리를 주며 신라로 돌아가 사리탑을 짓고 절을 이루라고 했다. 이후 자장은 귀국하여 신라의 가장 높은 승직인 대국통 자리에 올랐고 그에게 계를 받고 승려가 된 사람이 열 집에 여덟아홉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에 자장율사는 금강계단을 만들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이렇듯 통도사의 중심은 금강계단이다. 금강계단 불전 안에는 부처가 없다. 경배의 대상은 바로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석가여래 사리탑이다. 이런 내력으로 통도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보사찰로 알려져 있다. 낙동강이 굽이치는 풍광 금정산과 금정산성

범어사의 모산인 금정산(802m)은 부산에서 가장 시원스런 조망을 보여준다. 정상인 고당봉에 오르면 유장하게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강과 부산, 양산, 김해 일대의 너른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트인 전망 때문에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금정산 능선에 둘려진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곽이다. 성곽의 길이가 자그마치 17㎞에 이르며 넓이는 830,370㎡ 에 달한다. 금정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왜구의 침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시대부터 어떤 형태로든 성곽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처럼 큰 산성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숙종 29년(1703)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경상감사 조태동이 “동래부가 남쪽의 국경에 위치하므로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며 금정산에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동래부사 박태환이 산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707년에 주성을 다시 쌓고 부대시설을 정비하고 순조 8년(1808)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당봉 남쪽 자락에는 금샘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꼭대기에 둘레가 3m 정도인 샘이 있다. 샘 안쪽 바위에 노을빛이 비추면 황금물고기金魚가 헤엄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란 이름이 붙었고 여기서 금정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범어사라는 절 이름도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글·사진 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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