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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법의 비약적인 발전을 있게 한 명인, 일산(一山) 김명환 판소리 명인
작성일
2018-01-30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958

고법의 비약적인 발전을 있게 한 명인, 일산(一山) 김명환 판소리 명인 판소리 고법(鼓法)은 판소리가 정착한 조선 중기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판소리에 맞추어 고수가 북으로 장단을 쳐 반주하는 것을 말한다. 고법은 판소리의 반주이기 때문에 고수를 내세우는 일이 없어 조선시대에는 고수로 이름을 날린 이가 드물었다. 조선 순조 때 손흥록의 소리에 맞취 북을 쳤던 손광록 등은 본래가 명창으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고종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박관석, 오성삼, 한성준 등 명고수가 나왔다. 01. 김명환은 수많은 근현대 명창의 북 반주를 맡았으며,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에 지정되었다. ⓒ한국전통연희사전
02. 명창 박봉술(좌)과 명고 김명환(우) ⓒ한국전통연희사전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구술/김명환 편집/김해숙, 박종권, 백대웅,이은자 뿌리깊은 나무 03 김명환의 구술을 옮긴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표지 ⓒ한국전통연희사전

과거에 고법은 판소리의 한 부분이지만 판소리를 익히는 방편의 하나로 여겨졌고, 때문에 발달이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고법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판소리가 매우 다양한 특성을 띠고 발전해 나간 조선 후기부터였다. 일산(一山) 김명환(1913~1989)은 바로 이 시기 고법의 비약적인 발전을 있게 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최근까지 활동한 김득수, 김동준 등과 함께 명고수로 불리는데, 김명환은 나머지 두 사람과 상당히 대조적인 고수였다. 그는 광대 집안 출신이 아니라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점부터 남달랐다. 그는 소리를 배우다 어찌어찌해서 북을 치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수가 되기로 작정하고 판소리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스무 살이 다 되도록 학교 공부만 했던 그는 일본 유학 시절 혼례 잔치에서 사람들에게 “소리 장단 하나 못 짚느냐”는 놀림을 받고는 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1930년 무렵 늦은 나이에 북꾼의 길로 나선 그는 명창이면서 북 솜씨도 뛰어났던 장판개의 문하에서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20세에는 박판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북을 익혔다. 이후 오성삼, 신찬문, 주봉현 등 지방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에게 북을 익혔고 서울로 상경해 걸출한 명창들 틈에서 북가락을 연마했다. 명창 박녹주와 김여린만은 그의 북 솜씨를 인정했지만, 양반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물에 기름 겉돌 듯이 소리판에서 겉돌면서 설움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김명환의 북소리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소리꾼을 적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사납게 북을 두드렸다. 마음에 안 드는 소리꾼의 북은 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실력이 모자란 소리꾼은 그의 북 앞에서 감히 입을 떼지도 못했다. 소리꾼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그는 마침내 ‘김명환의 북 솜씨를 따를 소리꾼은 없다’는 평을 듣게 됐다. 평생 한길만 묵묵히 걸어온 고집과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그를 소리판에서 제일가는 고수가 되게 한 것이다.

그는 임방울, 정응민 등 수많은 근현대 명창의 북 반주를 맡았으며,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고법은 1991년 제5호 판소리에 통합되기 전까지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로 별도 지정)에 지정되었다. 판소리 고법으로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것은 국내 최초의 일이었다. 반주를 선호하는 일반적인 유형과 달리, 그의 고법은 지휘를 선호하는 유형에 가깝다고 평가받는다. 북이 소리의 완급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북을 좇는 형태인 것이다. 그가 북을 칠 때면, 커다란 손바닥에서 울리는 소리가 매우 웅장했다고 한다. 또 김명환 특유의 변주법, 소란스럽지 않으면서 적시적소에 넣는 간결하고 위엄 있는 추임새 등은 당대 독보적인 고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김명환은 고법의 이론 정립에도 기여했다. 그의 고법이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앉는 법으로 고수가 소리꾼의 왼편 조금 앞에 북을 놓는데, 보통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 밑에 넣고 그 앞에 북을 놓지만, 김명환류는 왼쪽 무릎 옆에 놓고 친다. 둘째는 손놀림으로 북채를 옆으로 많이 벌리거나 머리 위로 치켜 올리는 수법은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셋째는 타점법(打点法)으로 북통을 치는 자리는 고수에 따라서 4〜6점이 보통인데 반해, 김명환류는 북통의 꼭대기 가운데·북통의 꼭대기 오른쪽 모서리·북통의 앞쪽 오른편 자리의 3점이다.

단순한 반주의 차원을 넘어서는 김명환의 고법은 판소리에 있어 고법이라는 개념이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끊임없이 수많은 명창과 명고를 찾아다니며 배우고 연마한 이론과 실기, 그리고 고집스러운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고법과 판소리 이론은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널리 인정받고 있다.


글. 성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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