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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터 발굴에 집념을 다한 ‘주지’
작성일
2017-12-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463

절터 발굴에 집념을 다한 ‘주지’ - 윤덕향 호남문화재연구원장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중 하나인 호남문화재연구원을 이끄는 윤덕향 원장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재직 시절 별명이 ‘주지(住持)’다. 하도 절터만 팠기 때문이다. 손댄 절터가 몇 군데냐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 “생각보단 많지 않아요. 남원 만복사지랑 익산 미륵사지, 그리고 경주 감은사지 정도예요.” 한국 고고학사에서는 지울 수 없는 절터 발굴로 기록되는 곳들이다. 이런 현장들은 그가 청춘을 다 바친 평생 잊지 못할 곳이며 나아가 이후 그의 인생 향로를 바꾸게도 한 결정적 장소다. (좌)1970년대 서울 석촌동 백제고분 발굴현장 (우)윤덕향 호남문화재연구원장

고고학자, 윤덕향 원장에 대하여

윤덕향 원장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재직할 당시만 해도 발굴현장에서는 절터 담당현장 책임조사원 학예연구사를 ‘주지’라 불렀다.

“가장 유명한 주지가 숭실대 최병헌 선생이지요. 황룡사지 발굴책임자셨으니깐. 신창수 선생이 황룡사 주지를 이으셨지요. 황룡사는 역대 주지 이름이 몇 명 나오지만, 제가 조사한 미륵사지는 주지 이름이 없어요. 아마도 지명 법사라는 스님이 초대 주지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래서 저는 2대 (미륵사) 주지라 했어요.”

익산은 윤덕향 원장에게 남다른 곳이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익산에서 태어난 그의 고향은 백제시대 고분인 입점리 고분군이 있는 마을이다. “입점리는 제가 조사를 못 했어요. (원광대학교) 최완규 선생이 있잖아요.” 대신 그는 미륵사지 현장을 맡았다. “당시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좀 있었어요. (문화재연구실) 김정기 소장께서 아마 이런 것도 고려하셔서 저를 미륵사지에 보내셨을 겁니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68학번인 그의 이력에서 조금 독특한 대목은 입학 8년 만인 1976년 2월에 졸업했다는 점이다. 중간에 군 복무를 빼고도 학부 생활이 길었다. “그땐 10년 다닌 사람도 드물지 않습니다. 3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노동일 씨가 이끌던 서울 문리대 학생회에 제가 관여했어요. 유인태 씨도 있었고요.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전태일 씨가 분신자살하고 시국이 어수선했지요. 이런저런 사건들에 휘말려서 공부도 하기 싫고, 군대도 다녀오고 하다 보니 늦어진 거예요. 학부 졸업하고선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2년 만인 1978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석촌동 유적 발굴 당시의 기억

학부와 대학원 시절, 그는 서울 석촌동 고분과 연이 닿았다. “제가 석촌동 유적을 처음 본 것은 학부 2학년 때(1969년) 답사 차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러다가 1974~76년 무렵 사건이 터진 겁니다. 서울시에서 도로를 내면서 고분들을 파괴한 것이지요. 어느 날 삼불(김원룡) 선생이 석촌동으로 가라 해서 그곳을 발굴했어요.

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석촌동 발굴은 삼불 자신도 경험이 없었기에 구조조차 파악이 어려워 헤맬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특유의 복잡한 돌무지가 잔뜩 깔려 나왔다.

“신아일보 기자가 (현장으로) 취재를 왔는데, 삼불 선생이 그러셨어요. 적석총 길이가 350m라고. 그때 발굴이 그랬어요.”

서울대박물관이 조사한 석촌동 발굴 보고는 발굴 완료일로부터 3개월 안에 해야 했다. “정식 발굴보고서에 견줄 만한 행정보고였어요. 그런 보고서를 3개월 안에 인쇄까지 마무리해야 했죠. 선급금 일부를 받기는 했지만 제때 제출해야 나머지 조사비를 받았어요.

만복사지, 잊을 수 없는 발굴 현장

석사 학위를 취득한 1978년 5월 무렵, 윤 원장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 ‘103 일용직 잡급’이라는 임시 계약직으로 들어갔으며, 그해 연말 정식 학예연구사가 됐다. 직후 그는 남원 만복사지 발굴현장에 파견됐다.

“원래 만복사지는 전북대에서 발굴하기로 했었어요. 한데 전북대에 발굴 인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문화재연구소에서 관리감독관을 파견했는데 제가 간 겁니다. 만복사지는 10년 정도 발굴했지요. 2차 발굴 때까지 제가 하다가 미륵사지와 감은사지를 왔다갔다 했죠. 마지막에 다시 만복사지로 돌아왔으니, 그 시작과 마무리는 제가 한 셈입니다.”

만복사지 발굴을 위해 1985년 5월, 그는 전북대로 향해야 했다. “박물관에 계시다가 제주대를 거쳐 전북대에 부임한 이백규선생이 만복사지 발굴을 담당하셨는데 이 분이 경북대로 옮기게되니깐, 만복사지 발굴을 마무리할 사람이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후임자처럼 가게 된 거지요.”

만복사지 발굴이 궤도에 오를 무렵, 미륵사지 발굴이 시작됐다. “1978~79년 무렵이었어요. 경주에서 황룡사지와 안압지 발굴이 활발해지니깐, 호남 지역에서도 백제 유적을 정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요. 그래서 정부에서는 백제고도정비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곳이 대상지로 올랐지만, 문화재연구소가 맡기로 한 미륵사지와 원광대가 조사하기로 한 익산 왕궁리 유적이 규모가 큰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업이 틀어져서 왕궁리 유적까지 연구소에서 하게 된 거예요. 원광대가 익산 쌍릉을 발굴하게 된 사연입니다. 뭔가 보상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에게는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있던 삼국시대 군사 유적인 구의동 보루 유적 조사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한강 북쪽에서 강을 한눈에 조망하는 이 유적은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 일환으로 처음에는 백제고분이라 보고되어 조사가 시작됐다. “당시 화양지구를 서울대와 더불어 정영호 선생이 이끈 단국대, 그리고 임병태 선생이 지휘하는 숭실대 연합단을 조직해 발굴했어요. 잘 알려졌듯이, 백제고분이라 했지만 실제 파 보니 토기만 해도 백제것이 아니었고, 무덤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렇게 보고했다가 삼불선생한테 무슨 소리냐며 깨진 일도 있었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에야 (삼불 제자인) 최종택 씨가 고구려 보루라고 정정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전북대로 옮긴 윤 원장은 그곳에서 박물관장과 호남고고학회장 등을 역임하고는 2009년 교직을 나와 호남문화재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글+사진‧김태식(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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