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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 공간이 텅 비고 드넓으며, 일만 그루 단풍이 해처럼 붉게 빛난다
작성일
2019-10-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953

하늘 공간이 텅 비고 드넓으며, 일만 그루 단풍이 해처럼 붉게 빛난다 김창흡(金昌翕)의 「오대산기(五臺山記)」조선 숙종 때 정치 권력과 거리를 두고 처사로 살았던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66세 되던 1718년(숙종 44, 무술) 음력 윤8월에 오대산에 오르고 「오대산기(五臺山記)」를 지었다. 김창흡은 노론에 속하는 유학자였다. 그래서인지 오대산 제일의 풍수를 승려들이 차지한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승려들이 “일만납자(승려)들의 목숨꼭지가 바로 이곳에 있어서, 이곳이 아니라면 불자의 종자가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우습다” 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상원사 북쪽 암자의 주지 축경(竺敬)과 친교가 있어서, 그와 불교교리에 대해 논하고, 축경이 늘그막에 함께 주인공(일신의 주재, 곧 마음)을 불러깨우는 참선에 들자고 하자, 그 말을 받아들였다.
월정사와 상원사를 이어주는 9km 남짓한 오대산 선재길에고운 단풍이 물들어 있다. 연합콘텐츠

중추(仲秋)의 오대산 유람

김창흡은 임영(강릉) 호해정(湖海亭)에 머물고 있던 때에 신택지(辛澤之) 원장, 고달명(高達明)과 약조하고 윤8월 초6일부터 오대산 유람 길에 올랐다. 첫날은 강릉 구산서원의 전별연에 참석한 후 60리를 가서 촌집에 묵었다. 초7일은 빗속에 유삼(油衫)을 걸치고 길을 떠나45리를 가서 월정사에 묵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초8일에 오대산에 올라 60리를 가서 상원사 중대에 올랐다. 나흘째 되는 초9일에는 중대에서 내려와 상원사에서 조식을 먹고 길을 떠나 60리 길을 가서 월정사로 되돌아와서 묵었다. 초10일에는 비가 왔으므로, 월정사 선방에 묵으면서 글을 정리하고 고달명에게 쓰도록 했 다. 초8일에 월정사를 떠나 상원사의 중대에 오르기까지의 기록 가운데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산에 올라 위를 우러러보고 아래로 굽어보며 재차 어루만진 일이 저 유년 시대부터 있었거늘, 흰머리가 되어서야 와서 찾아보다니 만나본 것이 늦었다고 탄식하게 된다.

세 사람이 순여(筍輿, 죽여)를 나란히 하고 곧장 북쪽으로 향하여, 시내를 따라 나아갔다. 처음 땅은 바위와 시내가 그윽하고도 깨끗하여 감상할 만했다. 대략 10리를 가서 나무다리를 건너자, 양쪽 기슭이 잘린 듯 마주하여 천연으로 다리 놓을 터를 이루었고, 맑은 여울이 한가운데로 쏟아져 나와 거문고와 축 악기 소리를 낸다. 서쪽으로 나아가서 산기슭을 넘자 작은 암자와 마주쳤는데, 이름을 금강대라 했다. 그윽하고 으슥해서 은둔할 만하다. 다시 수백 걸음을 나아가매 사고(오대산사고)가 있다. 수많은 산들이 부지하고 공읍하여 만치 온갖 신령이 옹호하는 듯하다. 위아래 두 개의 각인데, 아래쪽 각은 쇠궤짝을 보관하고 위쪽 각은 선첩(왕가의 족보)을 모시고 있다. 둘레는 돌담을 쌓았는데, 낮고 작다. 숲에서 수십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화소(火巢, 산불방지를 위해 만든 빈터)를 두었지만, 너무 가깝고 좁은 편이다. 왼쪽에 영감사가 있다. 사고를 지키는 승려와 재랑이 거처하는데, 절은 고려 때 영건했다고 한다. 벽에 김부식의 글이 있기에, 글을 다 읽어 본 다음 북쪽 고개를 넘었는데, 너무 가팔라서 걸음을 옮기기 어려웠다. 시냇가 길을 따라서 다리를 서너번 건넜다. 다리마다 높이가 일백 자는 되었다. 삼나무 널판을 잇대어 만들었다. 순여에서 내려 어기적어기적 걸었으나 벌벌 떨려 잘 건널 수가 없다. 동쪽에 별도의시내가 내려오기에 흘깃 보니 아주 맑고 그윽하다. 계곡을 뚫고 나가 양양의 삼부연에 이른다고 한다. 신성굴이 곁에 있다. 옛날 유명한 승려가 은둔하던 곳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폐허이다.


김창흡은 20리를 가서 상원사에 이르렀다. 승려를 머물게 하여 밥을 준비시키고 곧바로 중대로 향했다. 바위를 부여잡고 올라가 10리쯤 가는데 길이 대부분 험하고 무서웠다. 사자암(獅子菴)을 거쳐 금몽암(金夢菴)에 이르렀다. 샘물을 떠 마셨는데, 그리 차갑거나 짜릿하지 않고 달고 부드러워 입에 대기 쉬웠다. 맛은 상품에 둘 만하여, 송나라 육우(陸羽)로 하여금 차 끓이는데 쓰게 하지 못해 한스럽다고 일순 생각했다. 오대산 샘물은 각각 별호가 있었다. 김창흡이 마신 물은 옥계수(玉溪水)였다. 서쪽은 우통(于筒), 동쪽은 청계(靑溪), 북쪽은 감로(甘露), 남쪽은 총명(聰明)이라고 했다. 암자의 뒤에는 돌사다리가 층지어 위로 향하여, 수십 걸음쯤은 되었다. 사리각에 이르자, 뒤에 석축으로 보루를 쌓은 곳이 둘 있었다. 바위로 이어서 교묘하게 단과 계단을 배치했다. 인공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천연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주봉까지 거듭 요충지가 이뤄지고 마디마디 석축이 있었다고 한다. 김창흡은 석가의 뼈를 숨겼다는 곳이 여기인지 저기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적멸보각이 석축의 앞에 있었으나, 방이 비어 있어, 보통 집의 재실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02.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는 월정사는 오대산 사고(史庫)가 있었던 곳이며,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祠勸善文)』이 보관되어 있다. ⓒ한국관광공사 03.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중대 풍로산(風爐山)에 자리 잡고있는 사자암 ⓒPixabay

산에 기대어, 산과 벗하여 살아온 삶

김창흡은 젊어서 여러 산들을 유람했다. 27세 되던 1679년(숙종 5)에는 삼부연에 집을 짓고 나무꾼과 섞여 지냈다. 이때 삼부연에서 이름을 취해 호를 삼연(三淵)이라 했다. 37세 되던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었다. 다만,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반대당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처사인 주제에 함부로 남을 ‘비난’한다는 비난도 들었다.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53세 때인 1705년(숙종 31) 9월에는 설악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706년(숙종 32) 8월 아내를 잃은 후 이듬해 1707년 청평산을 거쳐 설악산으로 들어가 10월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다. 이듬해 벽운정사가 불타자, 설악의 여러 곳에 영시암(永矢菴), 완심루(玩心樓), 갈역정사(葛驛精舍) 등을 지어놓고 시절에 따라 옮겨 다녔다. 영시암은 57세 되던 1709년(숙종 35) 9월, 갈역정사는 59세 되던 1711년(숙종 37)에 완성했다. 갈역은 지금의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이다. 갈역정사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62세 되던 1714년(숙종 40), 그의 시중을 들어주던 최춘금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04.‘단종애사’의 악역 세조에 얽힌 일화가 전하는 평창 상원사 ⓒ셔터스톡 05.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다. ⓒ한국관광공사

이로 인해 김창흡은 춘천도호부의 곡운(谷雲)으로 옮겨갔다. 현재는 화천군에 속하는 곳이다. 1714년(숙종40) 11월에는 벽계에서 금화 수태사(水泰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평강 부석사로 옮겼다. 이듬해 1715년 (숙종 41) 3월에는 강원도 이천(伊川) 온천에서 목욕하고 평강과 희령을 유람했다. 가을에는 곡운에 곡구정사(谷口精舍)를 지었고, 평강과 춘천을 왕래했다. 1717년과 1718년에는 갈역에서의 생활을 추억하여 「갈역잡영(葛驛雜詠)」 392수를 연작했다. 9월에는 전라도 고산(高山)의 안심사에 머물렀다. 68세 되던 1720년(숙종46) 3월, 아들 김양겸(金養謙)이 현령으로 있는 황해도 문화(文化)로 갔다. 윤3월에는 구월산을 유람하고, 5월에 영평으로 돌아왔다. 7월에는 곡운으로 갔다. 69세 되던 1721년(경종 원년) 12월의 신임옥사로 맏형 김창집이 거제로 유배되자, 아우 김창업이 울분으로 죽었다. 김창흡은 1722년(경종 2) 2월 19일 절필시를 짓고, 21일에 김언겸(金彦謙)의 별장 가구당(可久堂)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해 4월, 포천현 묘곡(卯谷)에 장사 지내졌다. 4월 29일, 김창흡의 형 김창집은 성주로 이배되어 즉시 사사되었다.


김창흡에게는 ‘청기발속지운(淸奇拔俗之韻)’과 ‘완심고 명지학(玩心高明之學)’이 있었다. 김원행이 대작한 「삼연선생영시암유허비(三淵先生永矢菴遺墟碑)」에 나오는 말이다. 전자는 세속의 저열함을 벗어던져 맑고 독특한 운치, 후자는 마음을 전일하게 지녀 의지를 발양함으로써 고명한 경지에 이른 학문을 말한다. 둘은 서로 조응하고 서로 북돋아주었다. 즉, 김창흡은 산수 유람을 통해 ‘청기발속지운’을 추구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완심고명지학’을 존재토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06. 단풍이 물든 오대산 숲길 ⓒ이미지투데이

산을 찾은 ‘기이한 행운’


김창흡은 상원사에 오른 후 다시 북대로 향했는데, 그 노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점심을 먹고 북대로 향하여, 이어서 수목이 조밀하게 덮인 곳으로 들어갔는데, 미끄러운 돌이 많아서 접질리기 쉬웠다. 택지(澤之)와 고생(高生)은 순여를 버리고 걸어서 갔으나, 나는 순여에 단단히 앉아 내리지 않았다. 심하구나 쇠약함이여! 자신은 안일하면서 남을 수고롭게 하니, 그것이 불가함을 알고는 있다고는 하여도 어찌할 길이 없다. 순여에 앉아 있으면서도 괴롭게 숨을 헐떡이니, 승려들의 어깨가 붉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10여 리를올라가면서 위태위태하여 위만 쳐다보고 굽어보지 않았다. 극도로 험난하다가 형세가 반전하여, 흡사 빛이 펄쩍 뛰어 올라오는 듯하니, 태양 신이 진흙 공을 내놓은 듯하다. 여기부터 봉우리 허리를 돌아가는데 바윗길이 험하여 고달파서 평탄하게 갈 수가 없다. 다시 한 등성이를 넘으니 북쪽 암자에 이르렀다. 높고 깊고 넓고 밝아서 여러 곳의 승경을 조망할 수 있다. 중대사와 비교하면 혼후함은 못 미치지만 시원함은 훨씬 낫다. 들어가 먼 산을 바라보니, 허공의 비취빛이 하늘에 접해 있어서, 태백산이 가까운 곳에 있는 듯하다. 그리고 첩첩 산마루와 겹겹 산봉우리가 둘러 있는데, 가장 가까운 것은 환희령(歡喜嶺)으로, 일명 삼인봉(三印峰)이다. 공읍하여 이리로 향하고 있는 것이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듯하다. 마침 경색이 밝고 멀어, 하늘 공간이 텅 비고 드넓으며, 일만 그루 단풍이 해처럼 붉게 빛난다. 뜰 가득 잎이 진 나무들이 있어서, 잎은 삼나무이고 몸통은 소나무이면서 거죽은 연한 푸른빛을 띠고 엄연하게 모여 서 있다. 온산이 모두 이 나무이다.


김창흡은 「오대산 유람기」의 마지막에 4미(四美) 5행(五幸)의 설을 말하여 감상을 덧붙였다.


대개 이 산은 기(器)가 중후하여 마치 유덕한 군자와 같아서 가볍거나 뾰족한 태도가 조금도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승경이다. 궁륭(아치) 같은 형상을 이룬 수풀과 거대한 수목이 큰 것은 거의 일백 아름에 이르러 심지어 구름 속으로 들어가 해를 가리고 있어서, 은은하기가 첩첩 산악과 같으니 청한자 김시습이 말한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서 속된 자들이 거의 이르러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하면 오대산이 가장 최고다’라고 한 것이 정말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승경이다. 암자가 수풀 깊숙한 것에 위치하여 곳곳마다 하안거에 들 수가 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승경이다. 샘물의 맛이 아주 훌륭하여 다른 산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이 또 다른 하나의 승경이다. 이러한 네 가지 아름다움을 지녔으므로 아(亞)금강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 장점을 들어서 아스라한 봉우리나 장대한 폭포와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더 뛰어난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여러 산들을 두루 구경한 것으로 말하면 바로 이산이 옥진(玉振, 최종연주곡)에 해당하기에 더욱 기이한 행운이다. 산에 올라 위를 우러러보고 아래로 굽어보며 재차 어루만진 일이 저 유년 시대부터 있었거늘, 흰머리가 되어서야 와서 찾아보다니 만나본 것이 늦었다고 탄식하게 된다. 이것이 또 하나의 행운이다. 금년은 보통의 다른 해와 같은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여 험한 처지에서 벗어난 해이기에, 이런 유람을 해낼 수 있었으니, 이것도 행운이다. 산 바깥에서 비를 만났으나 등산신발을 갖추자 날이 개어 환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행운이다. 단풍이 붉은 빛을 띠어 색조의 옅고 깊음이 감상하기에 아주 적합했으니, 이것도 하나의 행운이다. 혼자만의 흥취는 원만하기가 어려운데, 네 분과 함께 질탕한유흥을 공유했으니, 이것도 행운이다.


김창흡은 병들고 노쇠하게 된 이후 벗들이 흩어지고 사라졌음을 깨닫게 되는 때 이 글을 다시 본다면 수심을 풀어버리고 근심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등산의 기록이란 정말 그러한 효용이 있지 않겠는가.


글. 심경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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