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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왕립천문대
작성일
2019-10-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282

왕립천문대 간의대 동아시아의 천문학이 13세기 원나라 곽수경에 의해 꽃을 피웠다면 15세기에는 세종과 장영실, 이순지와 김담 등에 의해 조선에서 동아시아 과학이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왕권이 크게 약화됐던 고려는 이러한 혁신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들어선 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세종대왕의 주도로 천문학에서의 대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동아시아 과학사를 연구한 조지프 니덤은 “15세기 조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관측의기를 장비한 천문기상대를 소유했다”고 평가했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천문기구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에 맞는 모델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각종 천문기구들은 우리나라의 천문지리적 환경을 고려하여 만들어졌고 디자인은 한국적 솜씨가 가미되었다. 한국인의 기술과 미적 감각이 조화된 것이다. 장영실을 비롯하여 조선의 과학자들은 중국의 것을 참조했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 천문 관측과 기구의 원리만 받아들였고 그 모양은 창작에 가까운 것이었다. 01. 천안아산역에 있는 장영실 동상. 세종은 장영실과 이천에게 나무로 간의를 만들게 하였고, 실험에 성공하자 이를 구리로 주조하게 하였다. ⓒ위키백과 02. 이순지 영정. 이순지는 세종 때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조선 전기 대표 천문학자로, 간의는 이천과 장영실이 만들었지만, 실제 이를 사용한 사람은 역법을 담당한 이순지와 김담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3. 세종대왕릉에 전시된 간의. 간의는 혼천의를 간략하게 만든 천문기기로, 행성과 별의 위치, 시간의 측정, 고도와 방위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천체 관측기기이다. ⓒ위키백과

세종, 조선의 하늘을 관측하다

1432년인 세종 14년 초가을 어느 날, 세종은 경연 중에 문득 정인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 제도가 항상 중국을 따랐으나 유일하게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만이 이를 따르지 못했다. 경이 대제학 정초와 함께 천문을 연구하여 관측하는 기구를 만들어보면 어떤가?”

“전하, 제가 정초와 함께 힘을 써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과 하늘의 북극 간의 고도를 측정하는 것일 테니, 간의라는 관측기구를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세종이 명을 내린 뒤 7년에 걸쳐 경복궁 서쪽 후원에 천문관측시설을 건축하고 한양의 북극출지(北極出地)를 측정했다. 간의를 비롯하여 혼의, 혼상,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자격루, 옥루 등을 제작 설치하였다. 이것을 세종의 간의대 사업이라 부르며, 간의대는 한편으로 왕립천문대였다. 세종의 간의대 사업은 훈민정음 창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은 왕립천문대를 만들고 난 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농사는 의식의 근원이고 왕정의 급선무이다”라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중심에 농업이 있었고 그 배경에 천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간의와 아랍의 토르퀘텀

세종의 간의대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천문의기가 바로 ‘간의’이다. 간의(簡儀)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사용해왔던 관측기구인 혼천의를 간편하게 개량한 천문기기이다. 원나라의 곽수경이 혼천의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1276년 설계, 제작하여 1279년에 완성하였다.


혼천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측기구이나, 제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구로 활용되어 관측용도로는 불편함이 많았다. 이것을 대폭 개량하여 관측용도에 맞게 만든 것이 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간의다.


원나라 때는 이슬람 천문학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무렵 이슬람 지역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던 관측기구인 토르퀘텀(Torquetum)이 중국에도 들어왔고, 곽수경이이 토르퀘텀의 영향을 받아 간의를 만들었다.


혼천의는 적도경위의와 지평경위의라 불리는 환 등 여러 개의 둥근 환이 있어 복잡하고 이 둥근 환들이 관측자의 눈을 가리기 십상이었다. 천문을 묘사하는데 있어 황도가 중심인 서양과 달리 동양은 적도가 중심이었다. 따라서 천문도나 천문기기는 모두 적도좌표계를 사용했다.


곽수경은 지평경위의에 해당하는 부분을 없애고 적도좌표계만으로도 천체를 직접 읽을 수 있는 간의를 만들었다. 간의는 혼천의를 간단하게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곽수경의 간의는 종전의 천문기구에 비하여 그 크기가 매우 크고 정밀하다. 천문기구는 크면 클수록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다.



조선의 간의

간의는 기능 면이나 실용 면에서 매우 우수하고 비록 눈으로 보는 관측기구이기는 하나 근대적인 천문대의 기본적인 기능을 갖추었다. 조선에서는 세종이 1432년(세종 14)에 이천과 장영실에게 먼저 나무로 간의를 만들게 하였고, 실험에 성공하자 이를 구리로 주조하게 하였다. 간의 제작은 세종 때의 천문기구 정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의 하나이다.


1438년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세워 대간의를 설치하였고, 이외에 휴대에 편리한 소간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명나라에서도 원나라 때의 천문기구를 복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1437년에 간의를 비롯한 기구들이 황보중화(皇甫仲和)에 의하여 제작되기도 했다.


오늘날 세종 때의 간의는 없어지고 지금은 그 부품조차 남아 있지 않다. 중국에도 원의 곽수경이 만든 것은 없다. 현재 북경에 있는 것은 서양 선교사가 청나라 초기에 만든 것인데 이것을 만들기 위해 곽수경의 간의를 녹여서 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20톤 가까이나 되는 구리를 따로 구한다는 일이 쉽지 않아서 전대의 것을 녹여서 새로 만들 때 다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간의는 이천과 장영실이 만들었지만, 실제 이를 사용한 사람은 역법을 담당한 이순지와 김담이었다. 하늘에 이상한 현상(혜성이나 객성의 출현 등)이 일어날때마다 그들은 예외 없이 간의로 관측했다.


글. 정성희 (실학박물관 수석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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