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창극의 ‘새로운’ 전통을 꿈꾸는 젊은 소리꾼
작성일
2015-05-0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597

창극의 ‘새로운’ 전통을 꿈꾸는 젊은 소리꾼. 창극배우 민은경.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빗속에 남산 중턱의 국립극장 가는 길은 그윽한 운치가 있었다. 인생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날씨라 생각했다. 극장 지하의 카페에 마주 앉은 그녀는 작은 체구에 선한 눈매를 가진, 소녀 같은 이미지였다. 창극배우 민은경, 2년 전 국립창극단에 들어온 그녀는 입단하자마자 ‘서편제’의 어린 송화 역을 맡아 열연했고, 이후 ‘메디아’의 크레우사 공주, ‘장화홍련’의 홍련, ‘다른 춘향’의 춘향 등을 연기하며 점점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시간 남짓 그녀와 나눈 이야기, 그녀의 삶과 예술은 힘 있고 진중했다. 가녀려 보였던 첫인상은 금방 잊혀졌다.

 

필연 같은 시작, 그리고 지나온 길

서편제의 송화처럼 여름이면 산속에 들어가 폭포수 곁에서 소리를 했다. 다른 또래 아이들은 바다로 계곡으로 놀러 다닐 때 방학도 없이 연습만 하면서도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소리가 친구이고 놀이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 직장 때문에 목포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집 근처에 시립국악원이 있었던 거예요. 어렸을 때 제가 막 울다가도 텔레비전에서 노래만 나오면 뚝 그치고 따라하는 걸 보고 아빠가 노래에 재능이 있나보다 생각하셨대요. 한번 시켜볼까 싶어서 시립 국악원에 데려가셨던 거죠.” 울음소리가 우렁차 목청이 남다르다 싶어 시작한 판소리. 이제 어엿한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민은경은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인 성우향 명창에게 지도를 받았고 중앙대 음악극과에서 판소리를 전공했다. 탄탄대로였을 것 같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은 철저히 혼자가 되어 부딪히고 넘어지며 지나온 거친 험로였다.

“집안이 부유하지도 않았고, 국악계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어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죠. 하지만 제 자신의 감성을 찾아내는 건 스스로 연습하는 방법밖엔 없더라고요.” 판소리는 구전 돼온 노래다. 레슨은 스승의 소리를 따라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러니 실력을 키우려면 반복 연습하는 방법밖엔 별 수가 없다. 그래서 정말 악착같이 했다. 어려서부터 목통이 좋다는 소리를 들어왔지만 타고난 재능이 전부는 아니었다. 수없이 듣고 부르며 스스로 찾아가는 자신과의 싸움, 그녀에게도 그 과정은 고되고 어려웠다.

"당연히 잘 하고 싶죠.하지만 나만 잘 하려고 하면 안 되죠. 같이 캐릭터에 대해서 나이 대목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런 의견을 나누죠.그렇다고 똑같이 하면 아류밖에 안 돼요.나만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건 순전히 자신의 몫이죠."

01. 창극배우 민은경의 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창극의 다양한 면, 다양한 맛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엄지민

 

막막한 슬럼프, 그리고 되돌아온 길

“과연 내가 판소리만 해서 요즘 사람들에게 소리를 전달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죠. 하지만 그보다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소리가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했죠.”

대학 졸업반 때 찾아온 슬럼프는 늘 마음 한구석에 가졌던 다른 장르의 음악에 대한 욕심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 해보고 싶은 건 꼭 하고야 마는 성격, 기어이 퓨전 음반을 냈고 4년 동안 활동하며 자연히 판소리를 소홀히 하게 됐다.

가늘어진 목소리를 되돌리는 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른 살에 국립창극단 인턴이 된 민은경은 타고난 악바리 근성으로 지독하게 연습했다. 4년 동안 외도 아닌 외도를 하며 결국 자신에게 판소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해보면서 얻은 것도 많아요. 다양한 무대를 경험하면서 저만의 제스처도 생기고 감정표현 방법도 다양해졌죠. 대중의 코드를 읽는 눈도 생겼고요. 가장 큰 건 뿌리를 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뿌리가 든든히 서 있어야 열매들이 잘 자랄 수 있잖아요.” 창극은 창과 극이 합쳐져 있지만 결국 창이 우선이다. 퓨전 음악활동을 하며 극적인 부분을 풍성하게 하는 표현능력이 늘었지만 창, 그러니까 소리에 있어서는 부족함을 느꼈다. 연습실에서 살다시피하며 지독하게 연습했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정식단원에 뽑혔다.

02.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에서 민은경은 당돌하고 톡톡 튀는 새로운 심청을 연기했다. ⓒ국립극장 03. 최근 올렸던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민은경에게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녀는 오디션을 앞두고 원작을 몇 번이나 읽었다. 원작의 배경, 역사, 인물의 특징을 이해하니 작품에 임하는 태도부터가 달랐다.ⓒ국립극장

 

새로운 출발, 그리고 행복한 고민

십년 만에 뽑힌 신입단원이다 보니 쏟아지는 관심이 컸고,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담이 느껴지기도 한다. 공연을 올릴 때마다 역할 오디션을 하기 때문에 지원자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캐스팅이 되면 다른 역을 맡은 배우, 혹은 더블 캐스팅 된 배우와의 사이에서도 경쟁을 피할 수가 없다. “당연히 잘 하고 싶죠. 하지만 나만 잘 하려고 하면 안 되죠. 캐릭터에 대해서나 이 대목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 같이 그런 의견을 나누죠. 그렇다고 똑같이 하면 아류밖에 안 돼요.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건 순전히 자신의 몫이죠.”

물론 무조건 ‘다르게’, ‘독특하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원작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낸 개성은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원작을 읽고 분석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는 뭣 모르고 그냥 대본에 적힌 대로 읽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조금씩 경험하다보니 내 역할의 캐릭터를 만들려면 작품 전체를 알아야만 하더라고요.” 최근 올렸던 ‘코카서스의 백묵원’ 오디션을 앞두곤 원작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모르는 고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고, 배경장소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진도 찾아가며 공부하다시피 책을 읽었다. 아쉽게 주인공은 맡지 못했지만 원작의 배경, 역사, 인물의 특징을 이해하니 작품에 임하는 태도부터가 달랐다. 정말 재미있었다.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도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서편제’ 의 귀엽고 발랄한 어린 송화, ‘다른 춘향’의 기구하고 한 많은 춘향. 확연히 다른 새로운 캐릭터였다. 하지만 민은경은 무대 위에서 우려를 걷어내고 민은경만의 다른 춘향을 보여줬다.

04. 국립창극단‘ 서편제’ 포스터. 민은경이 국립창극단 입단 후 첫 번째로 연기한 작품이다. ⓒ국립창극단

반가운 변화, 그리고 즐거운 꿈

최근 창극은 다양한 소재와 형식으로 변신하고 있다. 우리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거나 아예 외국의 원작을 창극화하는 신선한 시도들이다. 이런 창극의 변신은 그 원형인 ‘소리’, 판소리의 선율을 제외하고는 얼마든지 허용된다.

“거부감을 갖는 분도 분명 있겠지만 전 생각이 달라요. 판소리에서 창극이 나온 것처럼 창극에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그게 전통을 버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평가는 갈릴 수 있지만 분명 긍정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관객의 폭이 넓어지고 있는 것. 특히 젊은 층의 호응이 뜨겁다. 그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창극의 다양한 면, 다양한 맛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전통 속에 현대를 담고,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의미 있는 변화들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이번에 ‘변강쇠 점찍고 옹녀’라는 작품에서 의녀 역할을 맡았어요. 캐릭터가 독특한 인물이죠. 어떻게 이 캐릭터를 표현할지 즐겁게 고민하고 있어요.” 창극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진다는 창극배우 민은경. 그녀가 만들어갈 창극의 ‘새로운 전통’이 궁금해진다.

 

글. 성혜경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