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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푸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이거늘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모르다니
작성일
2019-10-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971

푸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이거늘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모르다니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지리산을 사랑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58세 되던 1558년 음력 5월 10일(음력)부터 25일까지 17일간, 문도들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는데, 이것은 12번째 지리산 유람이었다. 그는 합천 삼가를 출발, 배를 타고 남해를 지나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쌍계사와 신흥사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와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한자 4,700여자에 달하는 이 장문은 우리나라 유산기 문학의 백미일 뿐만 아니라 조식의 사상이 무르녹아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이 글에 나와있는 조식의 지리산 유람 행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삼가 계부당(진주 금산에 있던 이공량의집), 사천, 장암 쾌재정, 사천만, 곤양 앞바다, 하동포구, 하동, 악양, 삽암, 도탄, 정여창 구거지, 쌍계석문, 쌍계사, 불일암, 지장암(地藏庵), 쌍계사(雙溪寺), 신흥사 쌍계사 앞, 화개, 악양현 현창(숙박), 악양, 삼가식현, 횡포역, 두리현, 정수역, 정수역, 칠송정, 다회탄, 뇌룡사

청청한 산에서 위안을 받다

선인들은 지리산을 두류산이라고 불렀다. 백두대간에서 흘러간 산이란 뜻이다. 또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렀다.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가 있는데, “방장산은 대방국남쪽에 있다”라고 간주되어왔다. 용성 즉 나주의 옛이름이 대방이었으므로, 선인들은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 불렀으며, 삼신산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조식보다 앞서 김종직(金宗直, 1431~1492)도 지리산에 오른 후 「유두류록」을 남겼다. 김종직은 1472년(성종 3), 어머니가 71세이므로 사직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여 함양 군수로 내려가 있다가, 조위(曹偉), 유호인(兪好仁) 등과 함께 음력 8월 14일부터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김종직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영남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우리 고장 산이다. 그런데도 남북으로 벼슬살이 하여 티끌 속에 골몰하다 보니, 나이는 벌써 40이건만 아직까지 한 번도 구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고장산인 두류산을 벼슬살이에 골몰하여 찾지 못한 것을 반성했으니, 그는 두류산을 곧 세속의 티끌로부터 보호해줄 청정한 공간이자 위안의 장소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천왕봉 성모묘(聖母廟)에서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그곳에서 일박을 했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 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당 안에 서로 베개 삼아 누웠노라니, 찬 기운에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솜옷을 껴입어야 했다. 종자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지리산의 비박에서 김종직은 일상과는 다른 경험을 한 것이다.



그는 합천 삼가를 타고 남해를 지나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쌍계사와 신흥사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와 유두류록을 남겼다.



지리산에서 지식인의 사명에 대해 사색하다

1558년 조식은 지리산 유람 도중 일두 정여창, 녹사 한유한, 조지서 부부의 유적을 차례로 방문해, 그들이 처했던 시대상황과 그들의 행적을 통해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에 대하여 사색했다. 조식은 지리산 유람이 끝나가는 날의 일을 「유두류록」에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5월 24일. 새벽에 흰 죽을 먹고 동쪽 고개를 올랐는데 그 고개 이름은 ‘세 번 탄식하는 고개(三呵息峴)’이다. 고개가 높아 하늘을 가로질러 있는데 오르는 사람이 몇 발자국을 걷고는 세 번씩 탄식을 한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두류산 산세가 가팔라서 백 리 가까이 올랐어도 그 가파름이 조금도 덜해지지 않는다. 우옹(愚翁, 李希顏)은 강이(剛而, 李楨)의 말을 타고 홀로 말채찍을 휘두르며 먼저 올라가, 말을 제일봉 머리에 세워 두고 말에서 내려 돌에 기대어 부채질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데 사람과 말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한참 만에야 이르렀다. 내가 고개를 들고 우옹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말을 탄 기세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을 모르는구려. 뒷날에 의를 좇는 일에도 반드시 남보다 앞설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우옹이 사과하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응당 꾸짖는 말을 할 줄 알았네 . 내가 잘못했네 그려.” 강이가 두류산을 돌아보니 검은 구름이 꽉 끼어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었으므로 이렇게 탄식했다. “산은 두류산만큼 큰 산이 없고, 가까이 있어 한눈에 바라볼 수 있건만 모든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보지를 못하는구나. 하물며 어질기로는 두류산만 못하고, 가깝기로는 눈앞에 대고 볼 수가 없고, 밝기로는 여러 사람이 볼 수 없는 지경이라면 어떠하겠는가?”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니 동남쪽 푸르고 가장 높은 곳이 남해의 뒷산이고, 바로 동쪽에 파도처럼 가득 차 엎드려 있는 곳은 하동과 곤양의 산이다. 동쪽에 은은하게 높이 솟아 검은 구름 같은 것은 사천의 와룡산이다. 그 사이에 핏줄처럼 서로 얽혀 있는 것은 강과 시내와 포구가 서로 통하는 곳이다. 산과 강의 견고함은 위나라가 보배로 삼았던 국토보다 낫고 너른 바다와 수많은 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백성들이 섬나라 조무래기 오랑캐에게 여러 차례 곤경을 당한 것은 각자의 책무를 소홀히 한 탓이 아니겠는가?



01.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지어진 지리산 쌍계사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대비(大悲)와 삼법(三法)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도를 닦은 곳이다. 02. 쌍계사로 이어진 십리길은 봄이면 벚꽃이 만발한다.


조식은 지리산 유람 노정의 곳곳에서 도심(道心)을 기르는 문제를 환기하였다.


지장암을 찾아가니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그가지 하나가 마치 은구슬 한 말을 모아놓은 듯했다. 그곳에서 곧장 아래로 내려갔는데 한 번에 두서너 리를 달려간 다음에야 겨우 한 차례 쉴 수가 있었다. 이윽고 양(羊)의 어깻죽지 고기를 삶을 정도의 짧은 겨를에 벌써 쌍계사에 이르렀다. 당초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발자국을 내디디면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어렵더니,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올 때에는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형국이었다. 이것이 바로, ‘선(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惡)을 좇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조식은 산놀이에서까지도, 살벌한 현실 속에서 매순간 정의[義]인지 사사로운 이익[利]인지를 구별하여 오로지 선과 정의의 끝을 붙잡으려고 고투하였던 것이다. 산림 선비의 기개가 나타난다. 훗날 정구(鄭逑)는 가야산에 올라 소리암(蘇利菴)에서 내려오면서 “참으로 남명 조 선생께서 가르치신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듯이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무너져 내리듯 쉽다’고 하신 말씀이 실로 오늘의 주제에 딱 맞는다”라고 하였다. 퇴계 이황(李滉)은 조식의 〈유두류록〉을 읽고, “산수에 노닐며 경승을 탐구한 사적을 볼 수 있는 이외에도, 그때그때 뜻을 부친 말이 격정적이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하게 하므로 그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라고 하였다.


 

03. 울창한 수목과 거친 산세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는 지리산 ⓒ셔터스톡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자신을 반성하다

현재 지리산에서도 조식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백운동계곡이다. 조식이 남겼다는 백운동(白雲洞), 용문동천(龍門洞天),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등의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다. 조식은 그곳에서, “푸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이거늘,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고 스스로를 반성했다. 혼탁한 세속을 미워하여 지리산에 올라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고 하였던 그의 모습을 이 시의 뜻에서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조식은 〈유두류록〉의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토로하였다.


04. 악양정은 일두 정여창 선생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정자이다.

나는 일찍이 이 산을 왕래한 것으로 치면, 덕산동을 들어간 것이 세 번이고,청학동과 신응동을 들어간 것이 세 번이며, 용유동을 들어간 것이 세 번이고, 백운동을 들어간 것이 한 번이며, 장항동을 들어간 것이 한 번이다. 내 어찌 산과 물을 탐내어 왕래하는 것을 번거롭다 꺼리지 않았겠는가? 내 평생의 계획은 화산기슭 한 자락을 빌려 노년을 보낼 땅으로 삼고자 함이다.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머물러 살 수 없을줄을 알고 맴돌면서 생각만 하다가 눈물만 흘리며 돌아 나오곤 했다.

이렇게 한 것이 열 번이나 된다. 이번여행은 초가지붕에 달린 박과 같이 죽은 송장이 되어했으나 이나마도 다시는 오기 힘들게 되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랴. 내 이를 두고 한번 시를 지어보았다. “황소 갈비 같은 두류산을 열 번 주파하니, 차가운 까치집에 세 차례나 둥지를 틀었다네.” 또 이렇게도 지어보았다. “일생을 온전히 하잔 계획은 모두 그릇되고, 이제는 방장산과의 맹서도 저버렸네.” 여러사람들이 모두 길 잃은 나그네가 되었으니 어찌 나만망설이며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흠뻑 술에 취한 사람을 먼저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뿐이다.


조식은 산놀이에서까지도, 살벌한 현실 속에서 매 순간 정의인지 사사로운 이익인지를 구별하여 오로지 선과 정의의 끝을 붙잡으려고 고투하였던 것이다.


조식은 이 지리산 유람을 계기로 3년 후 천왕봉이 바라다보이는 산청 덕천강 곁에 터를 잡았다. 혼탁한시대, 구차하게 벼슬에 나아가기보다 학문수양과 후 학양성을 통해 앞날을 기약한 것이다. 그의 제자들도 영남 좌도에서 실천의지를 다져나가, 왜란 때 민족의 위기에 방관하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의 정권에 참여하여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혁기에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05. 상불재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06. 쌍계사 북동쪽 계곡에 있는 불일폭포. 지리산국립공원 내 있는 자연폭포로 높이가 60m 에 이르는 폭포이다.

지리산 부근에는 승경과 유적이 산재한다. 합천 삼가 기양루, 섬진강, 쌍계사, 신흥사 등등 많은 곳이 예나지금이나 유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은 지리산 등반 때 우연히 만난 노인으로부터 성명과 문벌이 무엇이냐고 질문받고는 씁쓰름해했다. 어느 당에 속하는지 떠보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양연은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좋은 산수간에 술이 있다면 유령(劉伶)이나 석숭(石崇)처럼 술을 마실것이요, 시상이 떠오른다면 원진(元稹)이나 백거이(白居易)처럼 읊조리겠습니다. 하필 취향이 같은지 다른지는 따질 것이 있나요.” 자연 속을 남과 동행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당파를 따지고 취향을 구별하는 일은 부질없기 짝이 없지 않은가? 인간과 인간 의 만남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더더구나 산속의 대화는 천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글. 심경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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