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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라 왕경유적 발굴 - 1,000년 왕도의 수수께끼를 밝히는 설렘
작성일
2009-03-05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067



이번 발굴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신라문화권 학술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신라왕경의 구조와 왕궁의 규모를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기획연구 조사이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1,000년 왕도王都, 신라新羅 서라벌徐羅伐. 즉 신라의 왕도인 경주慶州일 것인데, 이유는 반도半島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천년을 지켜온 우리 역사의 최대 중심지이기 때문이리라. 1,000년 왕도의 수수께끼를 찾아서 우리나라의 옛 도시들에 대한 흔적, 즉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추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어느 경우에는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데조차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문헌상에 등장하는 성城이나 도시가 현재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도읍이라는 고조선古朝鮮의 왕검성王儉城에 대한 퍼즐 조각은 너무도 빈약하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것 같이 느껴지는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도王都에 대한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모두의 왕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면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모습을 보이며, 우리들의 기억 속에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서라벌徐羅伐, 즉 신라新羅의 왕도王都인 경주慶州일 것이다. 승자勝者의 도읍都邑이라는 결정적 요인이 있기도 하지만, 한 곳에서만 약 1,000년을 지냈기에 그 장구한 세월의 무게가 새겨 놓은 자취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1,000년 왕도王都! 한 왕조王朝가 건국하여 500년을 지탱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늘 한 곳에 도읍都邑을 정하여 1,000년을 변함없이 지낸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동시기 고구려나 백제는 상대적으로 짧은 존속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세 번 도읍을 옮긴 예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라新羅 서라벌徐羅伐! 반도半島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천년을 지켜온 우리 역사의 최대 중심지. 학생시절 수학여행의 추억이 아로 새겨진 곳.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모이게 한 그 배경에도 역시 신라 왕도로서의 역사적 지위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경주에 들어서면 그 아늑한 분지盆地 지형의 협소함에 놀라게 된다. 동, 서, 남, 북을 가로 막고 있는 주산들과 그 안의 서쪽에 위치하여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서천西川, 그리고 이 서천으로 흘러드는 지류인 남쪽의 남천南川과 북쪽의 북천北川. 이 세 하천이 감싸고 있는 좁은 공간이 신라의 중심지이다. 이곳에서 불과 100리 밖에 동해가 있다는 것을 실감키 어렵다. 이 좁은 분지 안에 신라 1,000년의 역사 퍼즐이 숨겨져 있다. 여기저기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무덤들과 기념물들. 이들이 신라 왕경王京의 일부분을 이루는 퍼즐 조각이다. 왕경王京이란 왕이 거쳐하는 왕궁을 중심으로 그 나라 수도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이다. 따라서 당대에 가장 번성한 곳이며, 중요한 산물이 모이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가장 활발했던 장소이다. 과연 신라 왕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세기 초부터 이곳에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초창기인 일제강점기의 조사 내용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대부분이 커다란 무덤을 파헤쳐 금은보화를 찾거나 값나가는 것들을 찾으려는 고물애호가古物愛好家의 각축장인 듯싶었다. 마구 파헤쳐서 얻어진 자료들은 마치 그림이 지워지고 옆면이 마모된 퍼즐 조각과도 같다. 어느 부분에 맞추어야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게 한다. 이들을 통한 왕경의 모습은, 그저 퍼즐 조각이 많고 화려하니, 막연히 대단하였으려니 할 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1,000년 왕도, 신라 왕경에도 왕궁, 관청, 사원, 시장, 무덤, 생산시설, 도로, 주택, 그리고 방어용 성곽 등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잃어버린 공간들과 늘어나는 퍼즐조각 신라 왕경에 대한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은 비로소 197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화되었다. 그동안 수집된 퍼즐조각(금관, 금제이식, 금동불상, 토기, 와당 등과 그 출토유적)으로 알려진 신라 왕경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찾아내고(발굴), 좀 더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서(정비)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목적이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거대한 무덤인 황남대총(98호분, 1973-1975년 조사)과 천마총(155호분, 1973년 조사)이 발굴되었다. 역시 기대처럼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부장유물들이 양호한 정보를 지닌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후 조사는 탄력을 받게 되었으며, 왕실의 정원인 안압지 발굴조사(1975-1976년), 그리고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지 발굴조사(1976-1983년)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황룡사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탔다는 사실은 발굴에 의해 여실히 그 처참함이 밝혀지고 있다. 즉, 금당지 등의 건물지에서 발견되는 초석들이 화재 시의 열에 의해 옆면이 터져나간 모습을 지금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심의 초점은 왕릉과 왕궁의 조사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왕릉급 무덤인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발굴되었으며, 월성로, 계림로 개설로 인해 중, 소형 고분들이 잇따라 발굴됨으로써 죽은 자를 위한 공간 정보는 상당히 축적되게 되었다. 특히 2007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하는 이른바 ‘쪽샘지구’ 신라고분에 대한 조사는 왕족, 귀족들의 무덤 발굴이라는 점에서 또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한편 신라인들의 살아있을 때의 공간, 그 중에서도 왕의 생활 터전인 왕궁에 대해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신라 초기의 왕궁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치 않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등에 근거하여 나정蘿井이나 오릉五陵이 있는 서남산西南山 일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에 따르면,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22년(서기 101)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왕이 옮겨 살았다’ 고 하였다. 아마도 이후 이 월성이 왕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이곳에(동문지 주변) 대한 발굴조사가 1979년 잠시 실시된 적이 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조사는 계속되지 못하고 아직까지 월성 내부에 대한 조사는 숙제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재성在城’명 기와는 이곳이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 특히 2007-2008년에 월성 내부 지역에 대한 ‘비파괴물리탐사’의 결과로 상당 기간에 걸쳐 대형의 많은 건물들이 중복되어 지하에 묻혀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향후의 발굴결과가 주목된다. 한편, 이 월성 주변에 대한 조사가 1984년 이후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특히 남천의 자연 방어 기능을 이용하면서 나머지 부분을 해자垓字라는 방어시설로 보완하였던 점 등은 이 월성이 지닌 의미를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해자가 마치 연못의 형태로 10여개가 연접하여 돌아가고 있는 것은 월성이 지닌 왕궁으로서의 성격 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적나라하게 조각된 남근석男根石을 비롯하여, 토우土偶, 목간木簡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목간은 인명, 지명, 관직명은 물론 물품명 등이 다양하게 가록되어 있어 당시의 문자 생활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찾아지다 신라 왕경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중반 황룡사지 남쪽 외곽의 조사에서 확인된 동서방향의 도로(너비 약 15m)의 발견으로 증폭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주박물관 신축 공사 시에 확인된 남북방향의 도로(너비 23m), 그리고 분황사 남쪽, 성동동, 동천동 등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도로유적들은 잔자갈과 모래, 흙 등을 층층이 깔고 점토로 견고하게 다지는 등 아주 치밀한 토목공법이 적용된 뛰어난 기술을 보이고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일인 학자들이 추정 안을 발표한 이후 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듯이,

이는 신라 왕경이 크고 작은 도로를 중심으로 마치 바둑판 모양의 격자로 구획된(하나의 구획 공간이 곧 1坊) 방리제坊里制로 구성된 고도의 계획도시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황룡사지 동쪽에서 실시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이른바 ‘S1E1지구’에 대한 발굴조사(1987-2002년)는 본격적인 신라의 도시계획 구조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동-서 도로와 남-북 도로로 구획된 한 방坊의 크기가(동서 167.5m, 남북 172.5m) 확인되었으며, 그 안에서 수많은 건물과 우물, 좁은 도로,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와당이나 토기 등은 당시 이 지역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또한 2007년부터 시작된 안압지 북동편에 대한 조사는 신라 왕궁의 영역은 물론 왕경의 구조 등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속속 쏟아져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대형 기단을 갖춘 건물지와 담장의 실체, 정교하게 조각된 석조石槽,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철제 망을 갖추고 있는 배수시설 등은 현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특히 상아제 주사위는, 1970년대 안압지에서 발견된 주사위와 더불어, 당시의 놀이 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한편, 분황사의 동편에 자리한 원지園池유적의 발굴은 용강동 원지유적과 더불어 당시의 조경에 대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신라 왕경 내에는 이처럼 왕궁과 사원, 그리고 수많은 관청 건물과 민가, 도로들이 있었다. 또한 시장市場도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소지마립간 때 처음 시장을 열었다고(490년) 하며, 이후 지증마립간 때 동시東市가(509년), 효소왕대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설치되었다고(695년) 한다. 아직 이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어떤 규모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신라 왕경에 대한 연구는 몇몇 중심 주제(고분이나 사찰 등)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다. 천년을 한 터전에서 살아왔으니 그 층의 두께와 갈래가 얼마나 두텁고 다양하랴! 그 후 다시 천년이 지난 지금에서 그 왕경의 퍼즐이 서서히 되찾아지고 맞추어져 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조각이 멸실되고 왜곡되었을지 모른다. 다만, 새로운 방법과 지혜가 그 잃어버린 공간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글ㅣ지병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사진ㅣ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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