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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자의 자격, 美를 추구하다 - 조선시대 꾸미는 남자 VS 21세기 그루밍족
작성일
2018-08-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928

“내 몸, 보기에 어때? 보정속옷 좀 입어봤거든.” “이 화장품 써봐. 아주 좋아. 모공이 좁아지고 피부가 환해져.” “난 이번 여름에 레이저시술로 피부 관리 좀 할까 해.” 얼핏 들어보면 미용과 패션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여성들의 대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2018년 현재, 다양한 나이와 직업군에 속한 남성들이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지구촌 곳곳에서 흔한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보정속옷으로 어깨를 넓어 보이게 만들고 엉덩이에 패드가 들어간 속옷을 착용해 건강미를 과시하는 남성들이 꾸준하게 늘고 있고, 이들이 온라인 상점과 백화점에서 미용과 패션에 대한 지속적인 소비를 통해 전체매출의 상승을 주도하는 소비층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01.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중 「노상파안(路上破顔)」.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외출을 할 때, 부채를 가지고 나갔는데 접는 부채의 쇠고리에 목제 장식물을 달거나 금, 은, 비취, 호박 등으로 장식을 달고, 장식 안에 향을 넣어 다니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02. 현대 그루밍족들의 외모 가꾸기는 단순히 밖으로 보여지는 장신구에 돈을 쓰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간단한 기초화장부터 진한 색조화장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미지투데이

그루밍족의 오랜 역사(?)

그루밍족(grooming族). 오늘날, 외모를 가꾸는 데 열정적인 남성들을 부르는 이 용어는 케임브리지 영어사전에 수록되었을 정도여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신조어가 아니다. 남성들이 즐기듯이 외모를 가꾸고 이를 통해 사회적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현상은 역사적으로도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조차 남성들이 향수 목욕을 즐기고 금발로 염색하는 일이 유행했고, 보리 가루와 버터로 화장을 했으며, 악어 배설물을 섞은 진흙 목욕으로 전신을 관리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어떠했을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답은 “그렇다”이다. 우리 역사 속에, 성리학을 생활규범으로 삼았던 조선에도 외모를 치장하고 정성스레 꾸미는 그루밍족은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꾸미는 남자들’

조선시대 남성들은 머리 장식에 큰 공을 들였다. 조선시대에는 맨상투를 보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 하여 상투 위에 상투관을 썼다. 상투관은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하였는데 뿔·나무·종이·가죽에 흑칠을 하였다. 상투를 틀고 나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網巾)을 두르고 양 가장자리에 단추모양의 관자(貫子)를 달아 머리 크기에 맞게 조절하여 썼고, 망건 앞에는 갓을 고정시키는 풍잠(風簪)을 달았다. 조선시대 남성들에게 관자와 풍잠은 대표적인 머리 장신구였다. 1~3품의 당상관은 관자에 금과 옥을 사용하고, 3품 이하 서민까지는 관자에 뼈·뿔·호박(琥珀)·마노(瑪瑙) 등을 사용할 수 있다고 『경국대전』에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경제력이 있고 꾸미기를 즐겨 하는 사람일수록 벼슬과 무관하게 값진 재료를 사용하고 꽃이나 대나무, 연꽃 등의 무늬까지 새겨 넣어 화려함을 더하곤 했다. 풍잠은 주로 타원이나 반달 모양으로 상아나 호박처럼 값비싼 보석류가 큼직하게 쓰이곤 했으니 검은 빛깔 망건을 쓴 남성의 이마 중앙에서 얼마나 존재감을 발현했을지 보지 않았음에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낼 만하다. 이외에도 상투를 마무리하여 고정시키는 비녀와 비슷한 기능의 동곳이 있었는데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은 금, 비취, 산호 등으로 사치스럽게 만들어 사용했고, 취향과 형편에 따라 백동, 주석, 나무, 뿔 등으로 담백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극에서 똑같은 모양으로만 보아온 갓도 조선시대 남자들 사이에선 시대마다 유행하는 모양이 달라지곤 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갓의 윗부분인 모정이 좁아지는 모양이 유행하여 양반들이 갓을 머리에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갓이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손으로 끈을 부여잡고 다녀야 하는데도, 너나 할 것 없이 좁다란 모양의 갓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요즘 젊은 남성들은 머리에 무스나 헤어 왁스를 바르고 원하는 모양으로 정돈하기 위해 작은 휴대용 머리빗 정도는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흔하다. 조선의 선비들도 휴대용 머리손질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 남성의 귀밑털을 살적이라고 하는데 이 살적이 흘러내리면 망건이나 머리 위의 관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살쩍밀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남성들의 머리꾸미기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오늘날 그루밍족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조선시대 남성의 의복은 현대의 것과 비교하거나 여성의 것과 단순비교하기에는 형식이나 소재 면에서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제한된 소재와 종류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가능한 선에서 자신을 근사하게 꾸미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갓끈과 허리띠라 하겠다. 옥·마노·호박·산호·수정 등을 사용한 구슬갓끈은 갓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부분으로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서 남성의 외모를 치장하는 데 장식적 효과를 극대화시켜준 물건이었다. 세종 때에 옥석·번옥·마노로 만든 갓끈은 당상관 외에는 금하고 향리는 옥·마노는 물론 산호·수정도 금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중종 때 점점 사치스러워지는 갓끈을 없애자고 건의하는 기록(『중종실록』 5권, 중종 3년(1508) 1월 8일 기사)까지 전해지고 있다. 허리띠도 갓끈 못지않게 장식적인 효과가 컸는데 붉고 푸른 원색부터 검고 흰 무채색까지 색상도 다양하고 소재와 매듭을 꼬아 만드는 방식, 장식으로 중간에 넣을 수 있는 보석류 또한 매우 다채로웠다. 조선시대에는 의외로 아기자기한 생활 속 소품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남성들도 많았다. 양반 남성들은 외출을 할 때, 부채를 가지고 나갔는데 접는 부채(摺扇)의 쇠고리에 대추나무, 배나무 등으로 만든 목제 장식물을 달거나 금, 은, 비취, 호박 등으로 장식을 달고, 장식 안에 향을 넣어 다니기도 했다. 또,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허리에 차는 호패에 달고 다니던 호패끈도 신분과 취향에 따라 상아를 깎고 비단실로 만든 술을 풍성하게 늘어뜨리는 등 매우 사치스러운 장신구로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조선의 남성들은 취향에 따라 귀고리를 착용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8년(1513) 1월 7일자 기록을 보면 ‘양평군의 나이 9세 때 큰 진주 귀고리를 달았다’고 적혀있고, 세종16년(1434) 6월 14일자 기록을 보면 ‘사대부 자손의 귀고리는 부득이 통용되는 물건이니 그것을 제외하고 민간의 사사로운 매매를 제한해 달라.’는 대목이 보인다.

현대의 그루밍족들은 단순히 밖으로 보여지는 장신구에 돈을 쓰는 것으로 외모 가꾸기를 끝내지 않는다. 남성들이 피부과 진료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간단한 기초화장부터 진한 색조화장까지 나름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역사 속 그루밍족들은 피부관리에도 열정적이었을까?

『춘향전』에 보면 ‘도련님 호사헐 제 옥골선풍 고운 얼굴 분세수(粉洗手) 정이하야 긴 머리 곱게 따 갑사(甲紗)댕기 듸렸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몽룡이 놀러 나가기 전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분세수’를 즐겼다는 것이다. 분세수란 쌀가루를 물에 타서 세수를 한 뒤 얼굴을 햇빛에 말리고 이를 씻어내면 얼굴이 뽀얘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오늘날의 ‘팩’과 같은 피부 관리법인 셈이다.

동곳 남자의 상투가 풀어지지 않게 고정시켜주는 수식물이다. 상투의 정상에 동곳을 박고 머리를 망건으로 둘러맸다. 그리고 망건은 당줄을 관자에 걸어 머리에 고정시켰다. 모양은 여자들의 비녀와 같이 머리부분과 막대부분으로 되어있다.

알고 보면, 보이는 것

쌀가루팩으로 피부를 가꾸고, 귀고리를 달고 향기 나는 부채를 팔랑이며 빛나는 구슬갓끈을 드리운 선비의 모습은 분명 매혹적이지만,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조상들의 이미지와 비교하면 매우 낯선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에도 꾸미고 가꾸기를 좋아했던 조선시대 판 그루밍족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태평성시도>라는 그림이 있다. 무려 8폭이나 되는 병풍그림 속에는 결혼과 장원 급제의 행렬, 고관들의 수레, 각종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인물들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이 휘몰아치듯이 펼쳐진다. 찬찬히 인물들의 면면을 곱씹어가며 그림을 감상해보자. 이전이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조선시대에도 그루밍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지금은 입가에 가득 미소가 번지는 장면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장면이냐고? 시장 그림 속 거울 가게 앞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남자들이다.

03. 신분과 취향에 따라 호패끈에 상아를 달거나 비단실로 만든 술을 늘어뜨려 사치스러운 장신구로 쓰기도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04. 남성의 귀밑털을 살적이라고 하는데 이 살적이 흘러내리면 망건이나 머리위의 관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살쩍밀이를 사용했다. ⓒe뮤지엄 05. 파초선은 정승이 외출할 때 쓰던, 파초 잎 모양처럼 만든 부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6. 조선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태평성시도」에는 거울 가게 앞에 모여 구경하는 남자들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07. 상투관은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하였는데 뿔·나무·종이·가죽에 흑칠을 하였다. ⓒe뮤지엄 08. 그루밍족은 외모를 가꾸는 데 열정적이며 이를 통해 사회적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미지투데이


글. 반주원((주)학생사랑 대표,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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