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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현대사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세계인권 기록유산
작성일
2019-04-30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603

한국현대사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세계인권 기록유산 5·18민주화운동기록물 ‘5・18’에 대한 ‘망언,’ ‘폄훼,’ ‘왜곡,’ ‘가짜뉴스’부터 최근 전두환 씨 재판까지 5・18민주화운동 관련 논란들이 뜨겁다. 내년이면 40주년이 되는 5・18민주화운동을 정쟁으로 이용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 같은 행위들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한편 으로는 5・18에 대한 ‘정치적 단죄’는 이루어졌지만 진실규명과 가해자의 사과 없이 이뤄진 과거청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날을 기록한 5월의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01. 5·18민주화운동은 광주(光州)와 전남(全南)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이었다. ⓒ유네스코 02.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장례식 ⓒ유네스코 03. 미국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월의 기록, 인류의 유산’

5·18민주화운동은 신군부의 폭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기록이자 한국의 민주주의와 현대사의 역사적 전환점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기록한 기록물들의 총칭이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이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날의 기록은 인류가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인류공동의 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등재 이유를 밝힌 뒤 광주 시민 스스로가 만든 공동체 질서와 민주주의를 위한 의로운 희생의 가치는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하고 지켜야 할 가치라고 평가했다.


다양하고 방대한 민주화운동 기록물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은 1980년 5·18 기간부터 이후 진상규명·피해자 보상이 진행된 2000년대까지 국가기관, 시민·단체, 군 사법기관, 미국무부 등에서 생산한 문서, 음성·영상, 필름, 사진 등 방대한 기록물을 총칭한다. 1980년 5월 신군부세력에 맞서 분투했던 시민들이 작성한 성명서, 호소문, 일기, 취재수첩에서부터 이후 5·18 진상규명 과정에서 생산된 진상조사 회의록, 피해자 보상자료,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 등 다양한 유형의 기록물이 망라되어 있다. 따라서 생산시기, 생산주체, 자료의 형태, 내용 등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소장처도 여러 곳에서 담당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의 전체 분량은 기록문서철 4,271권 858,904쪽, 흑백필름 2,017컷, 사진 1,733장에 해당하는 방대한 자료이다.


한국현대사 최초의 기록유산

다양하고 방대한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을 일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시기, 생산주체에 따라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민들의 기록물이다. 항쟁기간 동안 절박한 상황을 알리고자 시민들은 호소문, 선언문, 성명서를 작성하고, 계엄군의 야만성에 분노하고, 불안과 공포에 광주 시민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일기를 쓰고, 계엄군의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계엄군의 만행과 시민들의 의로운 희생의 순간을 기록하고자 사진을 찍고 취재수첩에 기록했다. 또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침묵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목소리를 담은 구술(증언)기록물이 있다. 이러한 시민들의 기록은 참혹하고 절박했던 모습과 현장, 시민의 헌신적 저항 활동을 생생히 전달하는 소중한 기록물이다.

둘째, 공공기관, 군 사법기관, 병원기록, 미국의 5·18관련 비밀해제 문서들이다. 항쟁의 기간 동안 관련 사항을 중앙정부, 지방정부에서 보고하며 기록한 공공기록물, 계엄령에 의해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재판기록, 환자들을 치료한 병원들의 진료비 청구기록, 한국의 정치 상황을 주목하고 있던 미국이 시시각각으로 상황을 보고받고 대책을 논의했던 보고서들이다.

이 기록물들은 5·18 당시 상황을 각각의 기관에서 정리한 기록물로 5·18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5·18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기록물이다. 1988년 국회에서는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5·18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청문회는 총 17회에 걸쳐 67명의 증인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진행되었다. 청문회의 모든 과정은 공중파를 통해 가감없이 방영되었고, 이 과정을 기록한 회의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1990년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피해자보상법’에 의해 시행된 피해자보상 과정을 기록한 보상자료는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보상기록이자 유형별 피해의 규모와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관련 기록물은 5·18에 대한 진실규명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거청산작업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이와 같이 5월의 기록은 그날의 진실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화 이행기의 역동적 과정을 보여준다. 침묵, 탄압되어왔던 시기에도 후세에 알리고자 군사정권의 감시를 피해가며 수집·보존해온 노력들, 그 결과 명예가 회복되고 보상이 이뤄진 과정들의 기록이 저항과 투쟁의 역사적 산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은 한국현대사 분야로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된 최초의 기록물이 되었다.

군사정권의 감시를 피해가며 수집・보존해온 노력들, 그 결과 명예가 회복되고 보상이 이뤄진 과정들의 기록이 저항과 투쟁의
역사적 산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계인권 기록유산으로서 5월의 기록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또 다른 이유는 5·18민주화운동이 갖는 위상과 가치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전환점으로 널리 인정될 뿐만 아니라 아시아지역 민주화운동의 표본이자 영감의 원천으로 평가된다. 아시아인권위원회(AHRC) 상임대표 바실 페르난도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과 그 이후의 광주 시민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독재를 청산하기 위해 벌여온 투쟁은 나에게 연대의 상징이자 영감의 원천”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필리핀, 태국,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여러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5·18민주화운동이 여타 동아시아 국가에 영향을 미쳤으며, 냉전 구도가 종식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이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은 ‘전환기의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는 과거청산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사례이다. 5·18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으로 그날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증언과 기록들이 생산되었으며,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광주민주화운동피해자보상법’이 제정되어 책임자처벌과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졌다. 남미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발생한 국가폭력과 반인류적 범죄행위에 대한 과거청산작업이 단편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광주에서는 ‘진상규명-책임자 처벌-명예회복-피해보상-기념사업’ 등 5대 원칙을 세워 과거청산모델을 만들었으며, 과거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세계인권운동사의 지평을 넓혔다. 물론 과거청산 과정에 미진한 부분들도 있지만, 5·18민주화운동은 과거사 문제의 준거나 모델이 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한국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이지만 한국 민주화의 초석으로서 가치와 유산을 남겼다. 나아가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보편적 가치로 추구하는 유엔과 유네스코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세계기록유산이다.

04. 시민들의 식량 지원 ⓒ유네스코 05. 시민들의 증언과 구술자료 ⓒ5·18민주화운동기록관 06. 시청 광장에서 열린 평화적인 집회 ⓒ유네스코 07. 국회의 진상규명 회의록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글. 양라윤(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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