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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과학적이자 혁신적인 무기 ‘쇠뇌’
작성일
2019-11-26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254

쇠뇌(弩)는 지지대를 활용한 기계 장치로 활이 잡아당기는 힘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데 비해 비교적 사용하기 쉽도록 만든 무기이다. 또한 쇠뇌는 간단한 기계 장치로 활시위를 걸어서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화살을 발사하기 때문에 노약자나 부녀자도 사용할 수 있었던 무기였다. 일반 궁수를 양성시키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과는 달리 쇠뇌를 쏘는 궁수는 간단한 조작 훈련만으로도 병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쇠뇌는 최고도의 정확도로 적을 치명적으로 살상할 수 있는 무기로 화약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과학적인 군사무기였다. 01. 궐장노. 궐장노는 사람의 힘으로 시위걸개에 시위를 걸어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이다. ⓒ유세현(영집궁시박물관 부관장)  02. 수노기. 쇠뇌의 약점인 느린 발사 속도를 증가시킨 것으로서 15초에 10발을 발사할 수 있다. ⓒ유세현(영집궁시박물관 부관장)

쇠뇌(弩)란 ?

쇠뇌는 활에 기계 장치를 부착시켜서 만든 무기로 노(弩)라고도 한다. 쇠뇌는 활시위를 손으로 당겨 쓰는 일반 활보다 발달된 무기로, 활이 쇠뇌 틀[노상(弩床)] 앞부분에 틀과 직각으로 장착되고, 쇠뇌 틀의 뒷부분에는 청동이나 철로 만든 발사 장치인 노기(弩機)가 설치되어 있다.


기계 장치인 노기는 시위걸개인 아(牙)와 시위걸개를 꽉물고 있는 방아쇠 멈추개인 곽(郭), 그리고 방아쇠 멈추개 아래 경사져 내려간 방아쇠인 현도(懸刀) 등으로 이루어진다.


쇠뇌의 발사 장치를 보면, 활시위를 시위걸개에 걸면 이 시위걸개를 방아쇠 멈추개가 물고, 또한 방아쇠가 이 방아쇠 멈추개를 물고 있다. 이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시위걸개에 걸려 있던 시위가 시위걸개에서 풀어지면서 활궁 의 탄력에 의해 화살이 발사된다.


쇠뇌 시위[弦]를 당기는 방법으로는 사람이 손으로 당기거나 발로 당기는 직접적인 방법, 소나 말 등의 짐승을 이용하여 당기는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


우리나라의 쇠뇌는 크게 공용(共用)과 개인용으로 분류된다. 먼저 공용은 한 개의 대형 쇠뇌 틀에 여러 개의 쇠뇌 활을 부착시켜 한 번에 수십 개의 쇠뇌 화살을 발사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여러 대의 쇠뇌를 고정시켜 연결하고 동시에 발사시키는 연노(連弩)를 들 수 있다. 개인용은 정확한 조준력을 갖춘 단발식(單發式) 쇠뇌와 연속발사가 가능하도록 설계된 연사식(連射式) 쇠뇌가 있다.



쇠뇌의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에서 쇠뇌가 출토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는 고조선 후기와 기원전 2세기부터 1세기 초에 해당되는 고조선의 부조예군(夫租濊君) 무덤,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가말뫼 무덤, 황해도 은파군 갈현리 무덤, 평양 이현리 무덤, 평양 정백동 무덤, 평양 정오동 무덤, 그리고 남부 지방의 경북 영천 용전리 초기 철기시대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유적에서는 쇠뇌의 부속품인 발사 장치와 쇠뇌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의 쇠뇌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와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 『자치통감(自治通監)』 등에 나타나는데, 이로 미루어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쇠뇌의 사용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 쇠뇌에 관한 기록으로 636년에 편찬된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에 고구려에서 사용되는 병장기에는 갑옷, 쇠뇌, 활, 극(갈구리창), 삭(긴 창) 등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구당서(舊唐書)』에 보이는 당의 대장군 이사마(李思摩)가 고구려군이 쏜 쇠뇌의 화살에 맞았다는 기록으로도 고구려에서 쇠뇌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쇠뇌에 관련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40 (잡지 제9) 직관지(職官志)에 군사 제도로서 ‘노당(弩幢)’의 기록이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제4 「신라본기」진흥왕 19년에 보이는 내마(奈麻) 신득(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8년에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타川)이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성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9년에 당나라에서 신라의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弩師]인 사찬구진천(仇珍川)을 데려가 쇠뇌를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삼국사기』 권제8 「신라본기」 성덕왕 30년에 차노(車弩)의사격술을 관람하였다는 기록과 『삼국사기』 권제9 「신라본기」 효성왕 30년에 쇠뇌를 쏘는 군사들을 검열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신라의 쇠뇌 기술이 상당히 발전하였음과 다양한 전투 양상에 알맞은 쇠뇌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는 쇠뇌제작과 운용을 책임지는 부서로 노부(弩府), 궁노도감(弓弩都監) 등이 있었으며, 쇠뇌를 개량한 팔우노, 수질노, 구궁노, 천균노 등 신종 쇠뇌를 많이 개발하였다. 특히 팔우노는 무려 8마리의 소가 활의 시위를 당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노(弩)는 수원 화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성에는 노대가 있는데,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것으로 서노대와 동북노대의 2기가 있다. 조선시대의 노는 수노, 궐장노, 강노 등의 종류가 있는데, 훈국신조기계도설(訓國新造機械圖說)에 수노와 궐장노가, 노해(弩解)에 강노와 녹로를 결합한 녹로노와 여러 개의 노가 연속적으로 발사되는 연노(連弩)법이 도면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쇠뇌의 장단점

쇠뇌의 장점은 전통 활에 비해 정확성이 높다는 점이다. 또한 활보다 더 강력한 화살을 발사할 수 있고, 여러 개의 쇠뇌를 연결시켜 동시에 여러 발의 화살을 집중 발사할 수 있었다. 활에 비해 적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쇠뇌의 은닉성과 정확성은 전술적으로 매복이나 복병의 무기로서도 그 활용도가 높았다.


단점으로는 발사 속도가 활보다 느리다는 것이다. 이 점은 화약 무기가 가진 장단점과 비슷하였으므로 화약 무기의 출현 이후에는 대형 쇠뇌는 사라지고, ‘수노’와 같이 가볍고 빠른 발사 속도를 갖춘 쇠뇌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활보다 더 멀리, 여러 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쏠 수 있는 쇠뇌는 시위가 당겨진 상태에서 조준을 할 수 있으므로 정확도가 높아 적을 치명적으로 살상 할 수 있는 무기로 화약 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과학적이자 혁신적인 무기였다.


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과학유산보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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