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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쌀 수탈의 도시 ‘군산’과 자생을 위한 일상의 도시 ‘강경’
작성일
2009-11-05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999




비옥한 토지와 귀한 쌀의 도시 군산

일본은 한반도에서 좀 더 세세한 연결망과 실질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군산, 마산포, 성진 등을 개항시키고 이들 지역에 또 다시 조계지역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내륙중심의 도시구조에서 부산, 원산, 인천, 군산, 마산포, 성진, 목포 등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중 군산을 무엇 때문에 개항을 시키고 새로운 도시로 개발하였는가? ‘쌀’이었다. 섬나라 일본에서 쌀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다. 전통적으로 농지와 수리시설이 개발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조선의 곡창 호남평야는 그야말로 군침 나는 곳이었다. 이에 따라 군산이 1899년 5월 1일 개항이 되자마자 이윽고 동년 6월 2일 지금의 영화동, 장미동, 중앙로 1가 일대를 중심으로 572,000 m2의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당시 군산은 서남쪽이 산지로 둘러싸이고 동쪽은 갈대밭이었다.

일본은 갈대밭을 매립하여 평탄하게 조성하고 일본의 도시망 가로체계에 따라 군산을 격자형 도시로 발전시킨다. 군산의 도로는 주변 평야지대로부터 쌀을 끌어 모으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모든 시설들은 군산역과 군산항 주변으로 집결되었다. 지금의 중앙로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장미동과 영화동에는 군산세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제 374호), 구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제 372호), 군산시청 제3청사 등 관청 및 관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시설들이 위치하였다. 중앙로 동쪽 즉 군산역사와 군산항 사이에는 운반된 미곡을 가공하기 위한 정미소 그리고 이를 지원해주기 위한 금융시설인 미곡조합 등이 밀집해서 들어선다. 즉 군산은 호남의 드넓은 평야지대로부터 수확된 쌀이 모여지고 정미소에서의 가공을 통해 이 쌀들이 일본으로 송출되면서 여러 금융조합을 통해 돈으로 환산되는 곳이었다. 정미소는 당시 군산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시설이었고 군산의 경관을 특징지어주었다. 정미소와 함께 군산의 특징적인 모습은 일본 농장 주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창고시설이다. 등록문화재 제 182호로 등록이 되어 있는 구 시마타니嶋谷 농장의 창고 시설(등록문화재 제 182호), 역시 당시 쌀 수탈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쌀이 만들어낸 군산의 도시 이미지는 1925년 에 출간된 <군산개항사>의 다음 구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도로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도처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렬하였으니 … 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 이에 따라 일제 강점기 군산의 도시발전은 어이없게도 군산 지역민들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와 겹치게 된다.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1934년에는 당해 생산된 1,672만석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891만석이 일본으로 송출되었다. 그중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된 300만석 이상이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되었다. 소설가 조정래는 당시 만경 평야의 분위기를 그의 소설 <아리랑>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곳이 바로 군산이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인 1907년에 이미 군산에는 일본인이 2,956명으로 한국인 2,903명 보다 53명이나 더 많이 살았다.


군산 근대문화재들의 특징

다른 조계지역과 달리 일본의 쌀 수급을 위한 위성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군산은 철도역사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서양 고전양식건축으로 이루어진 부산이나 신의주 철도역사와는 달리 전형적인 일본 목조건축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또 대형 간척사업과 농장을 구축하여 부를 획득한 일본인들은 당당하게 일본식 주거, 즉 적산가옥들을 지었다. 이에 따라 지금도 군산에는 골목골목 이러한 일본 적산가옥들이 남아 있어 군산의 근대적 정취를 남기고 있다. 군산의 일본식 주택은 부유층이 살던 단독주택과 여러 채가 연속되어 하나로 길게 이어진 나가야長屋주택으로 나누어진다. 단독 주택으로는 영화동에서 포목점을 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주택(등록문화재 제 183호)이 당시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히로쓰 주택은 근세 일본의 무가武家주택으로 비교적 넓은 정원에 정교하게 다듬은 다다미와 도코모마床の間그리고 속복도 등을 통해 전형적인 일본의 쇼인조書院造 형식을 잘 구현하고 있다. 이외에 강경지역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 목조에 외벽이 비닐판벽으로  2채에서 4채 정도가 연속되어 있는 나가야長屋주택과 점포와 주택을 겸하고 있는 소위 마찌야町屋 주택 등이 가로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64호인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일본사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동국사 대웅전은 당시 군산의 성격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던 군산세관 역시 몇몇 디테일은 서양건축의 양식을 표현해 내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은 일본 목조건축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쌀 수탈 도시로서의 군산을 형성했던 이들 건물들은 이제는 오히려 군산이 지닌 역사적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긍정적 요소로써 작용하고 있다. 군산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어청도 등대(등록문화재 제 378호)이다.
어청도는 자연 포구로 섬 자체가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지형을 지니고 있다. 군산항에서 약 3시간의 항해를 하면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이전에는 소흑산도와 더불어 뱃사람들의 위락시설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어청도에는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여러 도서 사이를 관할했던 전횡 장군의 묘를 모신 치동묘淄東廟가 있다. 어청도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은 고려시대 이래로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현재는 철새를 연구하기 위한 외국인 연구자들의 방문도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 선교사가 목포로 가던 중 이곳에서 순교를 하기도 했다. 어청도를 여인이 반쯤 누운 자세에 비교한다면 어청도 등대는 얼굴 부위에 위치하고 있다. 1912년 점등한 어청도 등대의 원형 평면 등탑은 상부로 갈수록 좁아져서 안정감 있는 입면형태를 갖고 있다. 삼각형의 페디먼트를 변형시켜 장식 처리를 한 진입구의 포치가 특징적이다. 페디먼트 상부에는 배꽃 모양의 장식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등탑 내부는 조립식 원형 계단이 그대로 남아 있고 수은의 비중을 이용한 중추식등명기에 사용되었던 와이어와 추가 움직이던 통로인 목재 덕트duct)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목재 덕트는 1층 등탑에서 상부 등롱의 등명기에 연결되어 있어 등탑의 초기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등대이다.



자생을 위한 일상이 녹아든 도시 ‘강경’

군산이 쌀 수탈을 위한 일본의 위성도시로서 성장해가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강경이었다. 강경은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군산에서 내륙으로 파고 들어가 강경천과 논산천을 통해 금강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천혜의 내륙항으로 금강 하구의 관문이었다. 강경은 금강을 이용한 수운과 육로를 통해 북으로는 공주, 남으로는 전주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를 배후지로 갖고 있었고 서해안을 타고 고깃배가 직접 내륙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산업적 기반은 강경을 조선시대의 3대 시장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1899년 군산항 개항과 더불어 경부선·호남선·군산선의 철도 개통은 강경의 상권을 급속히 위축시키게 되었다. 또 6·25전쟁,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어선의 대형화로 배들이 포구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고 강을 도로로 사용하기 위해서 매립하면서 거래의 도시 강경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도시 기능이 약해지면서 강경이 지니고 있던 근대건축들이 오히려 개발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대 근대도시로서 강경은 부산, 인천, 대전. 군산, 목포와 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른 도시가 근대를 통해 행정적, 정치적, 군사적 의미의 새롭게 성장해 나간 도시라고 한다면 강경은 근대화에 의해 피해를 받으면서도 자생을 위해 몸부림치며 생존해온 근대도시로서 포구를 둘러싼 시장 즉 일상이 녹아 있는 독특한 도시이다.



한옥과 일식가옥의 절충적 변화지

군산항이 생기면서 강경에까지 세력을 뻗은 일본의 관 중심 세력과 조선시대부터 강경시장을 장악했던 상인들 세력이 충돌하였다. 또 이곳에서는 일본문화와 우리의 전통문화, 중국문화 그리고 서양의 근대적 문화가 충돌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강경에는 한옥의 근대기적 모습과 절충적 성격을 지닌 건물들이 유독 많다. 근대기적 한옥의 모습으로는 구 강경노동조합(등록문화재 제 323호), 강경 북옥감리교회(등록문화재 제 42호) 등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북옥감리교회는 서구 교회의 예배 기능을 한옥을 통해 포용해 내고 있다. 남일당 한약방(등록문화재 제 10호)은 한옥과 일식가옥의 특징이 절충적으로 절묘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일은행 강경지점(등록문화재 제 324호)은 서양식 건축의 한국화 과정이 나타난다. 강경 화교학교(등록문화재 제 337호)는 한국적 특징과 중국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는 건물이다. 따라서 강경은 우리나라의 근대건축, 근대도시의 모습이 서양, 중국, 일본 등 다른 문화와 섞이면서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강경은 다른 근대도시와는 성격이 다르게 한민족의 자생력을 그대로 나타내어 주는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올 가을에는 덩그러니 비어가는 드넓은 호남평야의 논바닥을 보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맛보고서 쌀 수탈의 현장이었던 군산에서 쌀 한 포대와  쇠퇴해가는 시장을 자생력으로 버티려했던 일상의 도시 강경에서 해물젓, 창란젓, 멸치젓, 명란젓, 꼴뚜기젓 등 갖가지 젓갈을 사서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해보면 어떨까?   


글·사진 | 김종헌 배재대학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제공·전재홍, 한국철도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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