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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제 개항에서 해양대국으로
작성일
2009-11-05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397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개항

우리나라 지도를 북쪽에서 바라보면 나라 전체가 거대한 항구 그 자체로서 손색이 없다. 대륙으로 상륙하기에 좋은 지리적인 이점에다가 아직 외세의 손을 타지 않은 처녀지로서의 순수함은 열강들의 수탈 대상지가 되고도 남았다. 그 가운데 가장 눈독을 들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그 자신도 서구로부터 포함외교砲艦外交의 피해를 받은 나라지만 이제는 그 대상지를 조선으로 돌려 서구에게 당해서 배운 바대로 조선을 착취하는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의 거리는 50여 킬로미터 남짓이고 지금도 대마도의 북쪽 해안에 가면 부산 쪽에서 밀려온 한국 쓰레기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서로 이렇게 가까운 지정학적인 위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문화를 교류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그래서 일본문화의 근간은 우리 역사와 한 맥으로 통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창궐했던 왜구의 침탈이 말해주듯 우리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강화도조약을 맺은 것은 1876년 2월 3일이었고 부산항의 개항은 2월 26일이었다.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일본과 가깝고 좋은 항구인 부산이 주목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오랜 세월 오매불망 바라마지 않던 부산포의 개항으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는데 지금은 부산의 중심지가 되는 남포동이며 광복동, 대창동 등은 한적한 바닷가이거나 뒤에 매립한 바다였다. 부산을 통해 일본의 상품이 들어오고 일본에 미리 들어왔던 서양의 문물도 함께 들어오는 계기가 된다. 이는 조선의 문물에 심한 충격을 안겨주면서 문화적인 혼돈을 동시에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일본인들은 부산의 개항과 그들의 거류지를 확보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대규모의 매립공사를 수십 년 간 지속하여 부산포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나간다.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 가던 길을 더 북진하면 통진을 지나고 더 올라가면 갈마반도의 원산에 이르게 된다. 위쪽은 호도반도가 길게 남쪽으로 내려온 곳이고 갈마반도와 호도반도 사이 둥그런 해안에는 작은 섬들도 여럿이며 해안선도 돌출된 곳이 많아서 동해안 북쪽에선 천혜의 항구로 불리는 곳이다. 게다가 동해여서 수심도 깊으니 큰 배가 드나들기도 좋고 두 개의 반도가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곳이니 항구로서 이만한 여건을 갖추기도 어려울 것이다.

일본 쪽에서는 원산항을 개항시킴으로써 우리의 동해안을 따라 직항로가 개설된 셈이고 이는 곧 중국과 러시아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되는 셈이다. 1879년 일본이 원산항을 개항하게 하고 바로 이듬해에는 일본영사관을 개관하는 것도 다 계산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북쪽의 무궁한 광물을 수탈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항구가 아니었던가. 또 서울에서는 큰 고개를 넘지 않고 동해안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어서 경원선 철도가 1914년 개통되었다.


서해 항구들을 개항시킨 이유

인천항은 위의 두 항구보다 늦은 1883년 1월 1일에 처음으로 외국의 배에게 입항을 허락하는 개항을 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반발도 무척 심했다. 고종 16년(1879) 시임대신과 원임대신들이 연명으로 인천항의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에서 그 단면을 보게 된다.

“덕원을 특별히 허락한 것은 바로 여러 대신들과 의정부 당상이 공식 석상에서 의논하여 정한 것입니다. 인천에 대해서는 서울에서 100리 내에 가까이 있는 관계로 허락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높고 낮은 관리들의 여러 의견이 시종일관 여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덕원은 덕원만으로도 불리던 원산을 지칭한다. 그러나 서울과 가까운 인천을 개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천의 개항이 늦어진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들도 들었다. 하나는 병인과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사건이 일어난 곳이 인천 근처의 강화도였고 그를 모두 지켜보거나 그 폐해를 들은 인천 사람들의 반발이 심했고, 또 하나는 일본 쪽에서 밀물과 썰물의 높낮이가 너무 큰 서해에서 어느 항구를 개항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이 분분했던 이유도 컸다. 그러나 질풍처럼 불어온 외세의 바람을 어찌 막을 것인가? 제물포라 불리던 작은 포구는 결국 외국 배의 입항을 허락하게 된다. 이후 인천은 수도권과 서울을 보좌하는 항구로서 크게 발전하면서 지금처럼 광역시가 되었고,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인근의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이 문을 여는 계기도 되었다.

목포항은 조선말까지만 하더라도 유달산 기슭의 한적한 포구여서 고기잡이배나 드나들던 작은 어항에 지나지 않았다. 1897년에 개항되자마자 목포는 일본을 비롯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영사들이 몰려들면서 그들이 이권을 다투는 도시로 바뀌어간다. 그뿐이랴.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그들은 서양의 학문과 의술까지도 가져와 순박한 어항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서양의 문물로 대변되던 건축 양식도 도입하며 대리석 장식과 벽난로 등도 상륙시킨다. 그래서 아직도 목포시에는 일본식의 건물과 서양식의 준 르네상스식 건물이 공존한다. 목포는 호남벌 곡창을 풍요롭게 해주고 흘러온 영산강의 물을 모두 받아들이는 바다를 앞에 둔다. 게다가 영암반도며 화원반도, 그리고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박혀서 거센 파도도 들지 않고 바람도 잔잔한 바다이다. 이 좋은 점들 때문에 전라남도의 곡창이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되는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1899년에 개항한 군산은 또 어떤가? 전라북도의 기름진 들판을 탐낸 일본인들이‘땅따먹기’하듯이 야금야금 빼앗았고 그도 모자라 군산항을 개항시켜 쌀을 자기 나라로 실어갔다. 식민지 시절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나간 물자 가운데 95퍼센트가 쌀이었다니 그들이 얼마나 많은 쌀을 수탈해 갔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이곳은 고려 말인 1380년 왜구의 배 오백척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극심하게 했던 역사를 지녔다. 그때 최무선을 비롯한 장수들이 왜구들의 배를 화포로 불 질렀으며 퇴로를 잃고 육지로 떠돌며 노략질을 계속하던 왜구는 남원의 황산 전투에서 이성계에게 패하고 만다.

군산의 개항 이후엔 곡창의 쌀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전주와 군산 사이 국도를 닦게 한다. 일명 ‘전군가도’로 불리는 이 길은 수탈의 길이 되어 농민들의 눈물을 자아냈고 그 길에 가로수로 심은 벚나무들이 늙은 둥치를 추악하게 드러내며 아직도 남았다. 한때는 인근 사람은 물론이요 전국에서도 사람을 끌어들인 벚꽃놀이의 현장이 아니었던가?

강경은 금강의 하류이면서 곡창지대를 거슬러 올라오는 곳이고 조선의 3대 시장에 들 만큼 번성한 시장이 강나루 주변에 형성된 곳이다. 1평양, 2강경, 3대구라고 했던가. 서해와 호남의 물산이 거슬러 올라와 강경에서 육지로 팔려나갔으며 청주나 공주 등지의 산물 등이 이곳에 와서 강을 타고 바다로 팔려나갔다. 강경읍 주변에 원목다리며 미내다리 같은 돌다리가 유적으로 남았는데 이 유적들이야 말로 강경의 장시가 어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군산항이 열린 이후에는 오늘날의 서울과 인천 같은 관계를 지니면서 서로 보완하는 거점이 되었다. 그러니 이 좋은 물목을 어찌 일본 사람들이 가만히 두겠는가. 장사를 하기에도 좋고 쌀을 실어가기에도 좋은 곳 아닌가? 아직도 강경읍에는 일본식 건물들이 더러 남았다. 지금은 뱃길이 막혔지만 아직도 젓갈시장으로 옛 명성을 이어가는 데에는 그 역사성이 만만치 않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포구 역시 이곳이었다.


능동적 해양 개척이 필요한 시점

‘양귀는 화륜선 타고 오고 왜귀는 철차타고 몰려든다.’는 동요도 나돌았듯이 서세동점의 여파로 우리는 동해와 남해 서해를 모두 개방하였고 그 후속으로 일본은 철도의 개통을 통해 온 국토를 수탈의 대상으로 넓혀갔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우니 경제적인 목적으로, 원산은 청나라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인천은 서울과 가까우니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하였다. 조선의 쌀값이 일본의 3분의 1 가격이었던데 비해 일본에서 들어온 석유며 성냥, 화장품, 옥양목, 비누 등 각종 상품들은 부피에 비해 가격이 높았다. 게다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상품 값을 쌀로 받아갔으니 그 피해가 어땠을까? 그들이 합법적인 도량 기구나 제대로 사용했을까?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 국가이다. 또한 거대한 러시아 대륙과 중국대륙을 배후에 둔 항구이다. 근대사를 연 개항이 외세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이제 우리는 보다 능동적으로 해양을 개척해야 할 것이다. 조선 능력 세계 1위라는 자부심으로도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글·염상균 (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사진·군산시, 두산백과사전 엔싸이버,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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