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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의 힘 모두 모아 멀리 멀리 날려 보내리 - 김박영
작성일
2008-03-2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380



[b]활과 나[/b] 내 고향 예천에서는 활을 만들지 않는 집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도 활을 만들었다. 집 안에서는 언제나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드는 풀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잔심부름을 하며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활을 알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궁시장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엇이 될까. 나는 고향을 떠나 옷감 짜는 공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기계를 돌리다 잠시 생각에 빠지노라면, 활이 떠올랐다. 눈을 감아도,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게 그거여서일까. 깊은 밤잠을 청하노라면 당겨지는 활시위처럼 내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민어부레풀냄새가 그리웠다. 나는 다시 활 만드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가시고 안계셨지만 그 자리에서 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활은 나의 인생이 되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면 활도 고통스러워하고, 내가 기뻐하면 활도 기뻐하고, 내가 꿋꿋이 기다리면 활도 끝내 기다려 주었다. [b]활 이야기[/b] 뽕나무, 대나무, 참나무, 물소뿔, 소힘줄, 민어 부레, 소가죽, 벚나무 껍질. 이것들이 모두 활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들이다. 대나무는 활의 몸체, 몸체 양 끝엔 뽕나무, 손잡이엔 참나무. 대나무 바깥쪽엔 무소뿔을 입히고, 대나무 안쪽엔 소 힘줄을 민어부레풀에 섞어 바른 후 말려 벚나무 껍질을 입힌다. 수십 마리의 민어와 소 세 마리의 힘줄과 그리고 수백 번의 풀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나를 놓지 않고 활만 바라보았다. 고구려의 활과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기를 찾는 나의 활. 더 나은 재료가 있으면 바꿀 텐데 전통 재료보다 나은 걸 아직 찾지 못했다. 활과 함께 한 지 사십 년. 붓으로 물 열 되를 발라 마를 정도 돼야 활 하나 완성되는 기나긴 시간을 이기고, 지쳐 늘어지려는 나를 이기고, 아무도 몰라주는 외로움을 이기고 여기까지 왔다. 활 만들기는 나와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 만든 활은 화살을 튕겨낼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활은 곧 나다.

[b]활을 어르며 내 영혼을 어르다[/b] 모양을 다 갖췄다고 활이 되는 게 아니다. 붙이고 잇고 또 붙여 완성된 활에 숨을 불어 넣어줘야 활이 된다. 사용할 사람의 체력에 맞게 활을 조절하는 작업이다. 활을 무릎으로 누르며 구부렸다 폈다 길들이며 내 안의 기를 불어 넣는다. 그러면서 나의 정성이 배어들고, 나의 영혼이 배어들고, 나의 꿈이 배어든다. 이렇게 활을 어르고 나면 진정한 활이 된다. 또 하나의 내가 되는 것이다. 활을 만들기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없다. 그 숱한 시간과 길고 긴 기다림과 깊고 깊은 외로움을 활을 어르듯 내 마음 속에서 다독인다. 그리고 언제나 다시 시작한다. 세상의 힘 모두 모아 시위를 당기듯이, 나의 영혼을 당기며 활을 만든다.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기다리고 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힘이다. 외로울수록 내 활은 멀리 날려 보낼 힘을 얻고, 기다릴수록 내 활엔 영혼이 배어든다. 나는 오늘도 나를 놓지 않고 마음의 시위를 당긴다. ▶ 글 | 이지혜 ▶ 사진 | 장병국, 신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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