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품삯 받고 대리소송代理訴訟 하는,외지부外知部
작성일
2015-05-0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140

품삯 받고 대리소송代理訴訟 하는,외지부外知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인간 사회에서 갈등과 분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를 조정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 시스템이 법률 제도이다. 전문적인 법률 환경에 익숙하지 못한 개인들에게는 법적 문제를 자문하고 도와줄 대리인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수요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외지부外知部’라는 전문 직업인이 활동하였다.

 

법률 전문인의 필요성

법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회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 보완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간다. 성종 대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이자 만세불변萬世不變의 최고 법전으로서의 지위를 누렸으나, 곧이어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시작으로 19세기 말까지 새로운 법전들이 계속 편찬되었다. 법전으로 종합 정리되기 이전 단계에는 수교受敎 및 절목節目, 사목事目등의 형태로 존재하는 법령法令들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이 같이 복잡하고 수시로 변화하는 법률 환경 속에서 개인들이 법률 지식을 확보하고 자신의 상황에 적절하게 활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개인이 평생 동안 소송이나 법률문제에 휘말리는 경우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특히나 하층민들은 문자 생활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최신 법률 정보를 그때그때 확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문적인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법적 문제를 자문하고 도와주는 직업인을 필요로 하였으니 ‘외지부外知部’가 바로 그들이었다.

01. 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에 수록된 그림. 조선시대 백성들이 관아에 소장(訴狀)을 제출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송을 부추기는 외지부

외지부의 어원은 장예원掌隷院의 전신인 도관지부都官知部에서 유래한다. 도관은 고려시대 노비 장부과 소송을 담당한 관청으로 원래 언부讞部 즉 형부刑部소속 아문이었다. 지부는 지부사知部事를 말하는데, 형부 소속의 종3품 관직명으로 도관에 파견되어 노비 소송을 판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장예원에서 노비 소송 업무를 담당한 형부 관리가 도관지부라고 한다면, 외지부는 도관 밖에서 지부사 행세를 하는 자를 지칭하는 속칭이다. 장예원 관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소송장 밖에서 소송에 관여하고 소송을 대리하는 등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직업적인 대송인代訟人으로서 오늘날의 변호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외지부는 소송인에게 대가를 받고 소장을 대신 작성해주거나 법률 자문을 통해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시선은 곱지 못하여 소송을 교사하는 무뢰배쯤으로 여겼다. 품삯을 받고 대신 소송장에 나가 소송하거나, 사람을 부추겨 소송을 일으키거나, 법률 조문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시비를 바꾸고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았다. 쟁송을 업으로 삼는 자, 소송을 교사하는 자, 비리호송非理好訟의 꼬리표가 붙었다.

결국 성종대에 이르러 1478년(성종 9) 8월 외지부의 활동은 전면적으로 금지된다. 발각될 경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모두 변방으로 쫓아 보내는 전가사변全家徙邊으로 엄중히 처벌하였다. 외지부를 신고하고 잡아온 자는 강도를 잡아온 예에 의하여 면포 50필을 상으로 지급하였다. 외지부가 불법화됨으로써 외부인이 소송장에 들어가는 대리 소송은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자서제질손子壻弟姪孫이나 소유 노비들에 의한 합법적인 대리 소송은 제외하였다.

02.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 중 <취중송사도>. 제2면은 지방수령의 행차 도중 두 소송인이 서로 변론하고 있는 장면이다. ⓒ국립중앙박물관 03. 강조이(姜召史) 소지(所志). 1733년(영조 9) 진주 영현리에 사는 과부 강조이는 죽은 남편이 받은 환자(還子) 문제로 진주목사에게 소지를 제출하였는데, 문서 양식에 맞추어 유려한 한문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 과연 하층민 여성이 스스로 작성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한국고문서자료관

 

은밀하게 활동한 외지부

그렇다면 성종대 금지령으로 외지부의 존재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을까? 『선조실록』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으니, 1603년(선조 36) 11월 25일 사헌부에서 부장部將 조정립曺廷立을 탄핵하면서 ‘비리 호송하는 외지부로 평생의 사업을 삼는 자’라고 지목하고 있다.

숙종 대 한위겸韓位謙은 중인 신분으로 비리호송을 업으로 삼으면서 관청의 인신印信과 공문서公文書 뿐만 아니라 국왕의 비답批答, 수교까지 위조하여 거래하다가 발각되었다. 1733년(영조 9) 11월 진주晋州 영현리永縣里에 사는 과부 강조이姜召史는 죽은 남편이 받은 환자還子 문제로 진주목사에게 소지所志를 제출하였는데, 문서 양식에 맞추어 유려한 한문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 과연 하층민 여성이 스스로 작성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오늘날 남아 전하는 고문서들 중에는 강조이처럼 스스로 작성했다고 보기 힘든 문서들이 간혹 눈에 띈다. 이 같은 사례들은 불법화 이후에도 외지부가 사라지지 않고 지하로 잠적하여 은밀하게 활동하면서 조선후기까지 계속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소송 없는 이상 사회를 추구하며 사송간詞訟簡을 지향한 조선 사회에서 소송에 적극 개입하고 부추기는 외지부의 존재는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송 없는 사회란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의 금지령이 그들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수요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문자생활에 익숙치 않고 법률 정보에 밝지 않은 일반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지부의 역할을 필요로 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이 활발하고 민의民意의 성장과 표출이 확대되어 갈수록 전문 법률가에 대한 수요도 증대하였을 것이다. 외지부는 15세기 후반에 불법화됨으로써 공식적인 제도로는 자리 잡지 못하였지만, 사회적 수요를 바탕으로 역사의 이면에서 활동하면서 수백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글. 김경숙 (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