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조선왕릉과 원의 신도비
- 작성일
- 2024-03-29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368
왕릉에서 보기 드문 신도비
조선왕릉 42기 중 신도비가 세워진 왕릉은 태조(재위 1392-1398)의 건원릉,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황후(1337-1391)의 제릉,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의 헌릉, 세종(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의 영릉 등 4곳뿐이다. 그 이유는 『세조실록』 세조 2년(1456) 1월 25일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종(재위 1450-1452)의 현릉에 비석 세우는 일을 논의하며, 영의정 정인지(鄭麟趾)는 임금의 공적은 역사에 기록하므로 비석 세울 필요가 없고, 태조와 태종, 세종은 특별히 공적이 크기 때문에 비석을 세운 것이며, 문종은 재위 기간이 길지 않아 기록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비석을 세우는 것이 필요치 않다고 하였는데, 그 의견이 수용되었다.
또한 세조는 왕실 무덤 석물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간소화하길 원하였다. 세조의 뜻을 받들어 예종은 풍수 문제로 헌릉 서쪽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옮길 때 신도비를 포함해 불필요한 석물은 땅에 묻어 두었다. 묻혀 있던 영릉 신도비는 1973년 발굴하여 현재 서울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 조선왕릉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17세기부터 무덤 주인의 이름, 출생과 사망 연도, 생전의 간략한 업적만 새긴 표석(表石)을 세우는 것이 정례화된다.
신도비도 피해 가지 못한 전란
왕릉의 신도비는 세종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제작하지 않았으나, 기존 것이 훼손되면 새로 만들거나 추가로 제작하였다. 황해북도 개풍군에 위치한 신의황후의 제릉 신도비는 본래 태종 4년(140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영조 20년(1744)에 기존 비석을 치우고 다시 세웠다.
태종의 헌릉 신도비는 세종 6년(142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어 숙종 21년(1695)에 새로 만들어 세웠다. 기존 비석이 귀부만 파손되었을 뿐 비신과 이수는 잘 남아 있어 귀부만 보수하고 남겨두었다. 그래서 헌릉 비각 안에는 왼쪽에 옛날 신도비가, 오른쪽에 새로 세운 신도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옛날 신도비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후궁의 무덤에 등장한 신도비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재위 1623-1649)는 자신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아버지 정원군과 어머니 연주군부인을 인조 10년(1632)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숭한다. 인조 14년(1636)에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원종의 어머니 인빈 김씨(1555-1613)의 묘에 조선 최초의 후궁 신도비를 건립한다.
그 당시 왕의 친부모인 사친(私親)을 추숭하는 것은 왕의 아버지가 세자인 경우에만 적용하던 것으로, 인조의 사친 추숭은 신하들의 큰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강행하였고, 인빈묘에 신도비를 세워 아버지를 낳은 친할머니의 덕을 칭송하였다.
이후 후궁 무덤에 신도비가 재차 등장하는 것은 영조대이다. 궁녀 출신 숙빈 최씨(1670-1718)의 아들로, 이복형 경종(재위 1720-1724)을 시해하였다는 의혹을 받으며 재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세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친 추숭에 힘썼다.
영조 1년(1725) 영조는 지금의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숙빈묘에 신도비를 건립했다. 영조 29년(1753) 궁원제(宮園制)를 시행하면서 사친이나 세자 내외의 사당은 묘(廟)에서 궁(宮), 무덤은 묘(墓)에서 원(園)으로 높였는데, 이때 숙빈묘를 소령원으로 높였다. 영조 31년(1755) 영조처럼 이복형제였으나 왕계를 이은 원종의 어머니 인빈의 묘도 순강원으로 승격시켰다. 후궁의 무덤에 등장한 신도비는 왕이 된 아들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 국왕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글. 강정인(궁능유적본부 궁능서비스기획과 전시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