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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의 역사와 애환
작성일
2013-06-14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0572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의 역사와 애환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의 역사와 애환

국기나 국가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외교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행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상징적인 표시물이다. 또한 국내에 거주하는 국민뿐만 아니라 국외 동포들까지 하나로 엮어주는 강력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조선 정보는 개항이후 국가간의 수교를 위해 공식 협약을 체결할 때 그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국기와 국가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조선의 국기는 1882년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박영효가 태극사쾌가 그려진 기를 도안으로 이를 고베의 숙소 니시무라야의 옥상에 게양함으로써 처음으로 태극기의 효시를 만들었다. 이후 조선정부는 1883년 태극기를 국기로서 공식 반포하였다. 이에 반해 국가는 그 필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음악에 대한 조예와 준비가 필요한 까닭에 국기의 경우처럼 빠르게 추진되지못했다.

01 등록문화재 제475호 애국창가 악보집. 국내외에서 불리던 애국창가(당시 애창되던 노래의 선율에 애국시를 붙여 만든음악)를 집대성해 1916년 미국 하와이에서 편찬한 등사본 악보집이다.

애국가 부르기 운동

조선 내부에서 국가國歌제정의 움직임은 각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활발히 진행되고 서구 문물과 접촉하며 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고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뒤10여 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서재필이었다. 그는 1896년부터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해 법치에 따른 민주주의와 민권의식을 배양해 자주자강의 독립된 국가건설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독립신문』발행 초기부터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 즉 각종 애국가류를 게재하였다. 1896년 4월부터 1899년 6월까지 『독립신문』에는 32편의 애국가류의 가사가 소개되고 있고 가사가 없는 것까지 합하면 36편이 넘을 정도이다.

또한 『독립신문』에 각종 애국가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민의례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1896년 9월 22일자 『독립신문』논설을 통해 각종 공공장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주창하였다. 애국가를 만들기 위해 조선 정부의 학부學部에서 애국가 제정위원회를 조직해 학생들로 하여금 매일 국기에 경례함과 동시에 애국가를 부르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한 국민의례 운동의 제안은 단순히 제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립협회를 비롯해 일반 민간에서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행사 때 초청된 배재학당의 학생들은 <조선가>, <독립가>, <진보가>를 불렀고, 또 다른 초청 학교의 학생들은 <애국의 노래>를 불렀다.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조선개국기원절 축하행사 때 역시 배재학당 학생들이 ‘오백여년 우리 황실 만세무궁도우소서’라는 축수가逐壽歌를 불렀다.

『독립신문』을 통해 확산된 애국가 부르기 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공립신보』, 『신한민보』등의 신문과 각종 학회지 등으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애국시가들이 <애국가>, <국민가>, <독립가>, <계몽가>, <진보가>, <찬미가>, <대한가>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905~6년경 이런 애국시가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일명 『애국창가집』으로 편찬하였다.

02 개화기의 정치가, 독립운동가 서재필.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로, 자주자강의 독립된 국가건설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03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1936년에 작곡한 애국가를 주제로 한 한국환상곡 등을 자작, 지휘하였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제정과 보급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 민간을 중심으로 애국가 부르기 운동이 추진될 때 조선정부는 1897년 10월 근대적인 자주국가임을 만방에 선포하기 위해 국가國家의 명칭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새로 성립된 대한제국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하여 각종 제도를 개혁하였다. 아울러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민영환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제권 강화의 명분으로 1900년 12월 29일 칙령 59호 ‘군악대 설치건’을 반포하고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한 후 군악 교육을 지도할 경험 많은 교사로 독일 영사 바이페르트Weipert의 주선을 받아 독일인 에케레트Franz Eckert를 초빙하였다.

에케레트는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이후 새로 신설된 군악대에서 음악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황실과 정부 행사에는 물론이고 시민을 위한 음악 연주도 시도하며 한국사회에 서양음악의 이해를 고조시켰다. 대한제국 정부는 서울에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에 나선 에케르트에게 대한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국가’작곡을의뢰하였다. 정부가 내세운 작곡 지침은 먼저 각국의 국가 음악을 참고하되 우리의 음악인 궁상각치우에 바탕을 둔 애국가를 작곡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에케르트의 애국가는 기존에 알려진 고종황제 탄신일(1901. 9. 7)이 아닌 1902년 1월 황실의 신년 하례식 때 초연된 것으로 추측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7년 7월 1일자로 『대한제국 애국가』라는 이름의 소책자를 발간하였고 동년 8월 15일 에케르트의 애국가를 공식 국가로 제정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는 그동안 민간층에서 불리던 각종 애국가류를 하나로 통합한 의미를 갖고 있다. 대한제국 학부는 『대한제국 애국가』악보를 각 학교에 보급하여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지시하였고, 외부外部는 각 조약국에 국가 제정을 통보하고 악보를 보급하였다.

04 대한제국 정부가 청설한 서양식 군대의 군악 교육을 담당했던 어케르트. 에케레트는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이후 새로 신설된 군악대에서 음악 이론과 실기를 가츠렸다. 05 대한제국 애국가 원본. 06등록문화재 제504호 대국가 유성기 음반. 1942년 미주지역 대한인국민회가 제작한 음반으로, 구애국가와 안익태 작곡 애국가, 무궁화 삼천리가 등 총 3곡이 녹음되어 있다. 07 등록문화재 제 476호 안익태 대한민국애국가 자필악보, 안익태가 관현악 총보와 피아노 반주가 붙은 합창보 두 개로 총 4쪽에 기록한 악보이다.

일제의 금지와 새로운 애국가의 탄생

그런데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정부의 지시와 의도대로 크게 확산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내용으로 보면 첫째로 가사가 한문투로 되어 있어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대한매일신보(1908. 7. 10)』는 한문투의 가사가 노래 부르기 어려우니 쉽게 개량해줄것을 제안하였다. 둘째로는 곡조가 부르기 어려웠다. 이는 우리의 전통 음악인 아악의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전통 민요의 영향 때문이었다. 요컨대 에케르트가 헐버트H. B. Hulbert가 채록했던 ‘바람이 분다(Korean Vocal Music, The Kprean Repository, February 1896)’라는 민요를 참고하면서 한국의 전통 민요가락을 서양음악으로 전이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담고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 외부적 요인으로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애국창가’를‘불량창가’로 간주하고 부르지 못하게 단속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모든 애국가류의 소개를 일체 금하였다. 더구나 일제는 한국인들이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통해 국권회복과 독립을 꿈꿀 수 있다고 우려하고 금지곡으로 엄격히 단속하였다. 대신 일제는 일본 창가로 된 『신편 창가집』을 발간(1914. 3. 15)해 기미가요를 비롯한 일본식 노래를 강요하였다.

이처럼 가사나 곡조에서 부르기 어려웠던 점, 일제의 금지곡 조치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의 보급과 확산을 막았다. 그런데 이런 제 요인보다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시세의 변화였다. 대한제국애국가의가사를보면, ‘상제上帝난우리황제皇帝를도우소셔 / 만수무강萬壽無疆샤 해옥수海屋壽를 산山갓치 삿으소셔 / 위권威權이 환영 瀛에치샤 / 어천만세於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소서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셔’라고 하며 국가보다 황제의 안위와 복록만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전근대적인 가사 내용은 국망 이후 독립운동으로 국민주권의 근대적인 민주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1899년 6월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라는 <무궁화가>와 작사 미상으로 오늘날의 애국가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추어 애국가로서 더 많이 보급되었다. 그러다가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금의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를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애국가로 정착하였다. 다행히 곡조는 1935년 11월 안익태에 의해 오늘의 애국가 곡조로 새로 작곡되었다. 그 후 미주 한인들의 요청을 받은 중경의 임시정부가 1940년 12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새 애국가로 승인해 줌으로써 가사와 곡조는 현재의 애국가 형태로 거듭났다.

나라의 상징물인 국가의 제정과 확립 과정을 볼 때 대한제국 애국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였지만 원치 않은 국망과 격변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녹아 들어간 새로운 애국가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국가로 부르는 현재의 애국가는 인위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수난과 역경 속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소중히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글.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사진. 문화재청, 독립기념관, 안익태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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