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사기장, 지문으로 남다
작성일
2018-11-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463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미술사학자인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년) 선생이 1941년에 조선일보사가 발행한 『조광(朝光)』 72호에 게재한「고려자기와 이조자기」에서 흰색의 분장토를 입힌 회청색의 사기라는 의미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砂器)’라고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이후‘분장회청사기’는 1950~1960년대에 국립박물관과 한국도자사 학자들에 의해 줄임말인 ‘분청사기’로 사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는 분청사기를 사기(沙器·砂器)와 자기(瓷器·磁器)로 기록하였다. 01. 분청사기덤벙분장병. 전면(全面)에는 덤벙기법으로 백토를 두껍게 분장하여 동체(胴體)의 거친 물레자국을 순화시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질감과 잘 어울린다. ⓒ국립중앙박물관 02. 분청사기에 표기된 장인 이름 ‘귀산(貴山)’(광주 충효동 가마터 출토) ⓒ국립광주박물관 03. 분청사기에 표기된 장인 이름 ‘박덕지(朴德只)’(광주 충효동 가마터 출토) ⓒ국립광주박물관 04. 분청사기에 찍힌 장인의 지문(전남 영암 상월리 가마터 출토)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 05. 분청사기에 표기된 장인 이름 ‘막생(莫生)’(전북 완주 화심리 가마터 출토) ⓒ국립전주박물관

소박함 속에 응축된 다채로운 기법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청자와 동일한 계통의 점토로 형태를 만들고 표면에 백토(白土)를 분장(粉粧)한 자기이다. 양식적으로는 고려시대 말기 상감청자에 연원이 있고 16세기 후반에 백자의 영향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청자와 백자를 합친 것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백토를 분장하는 방식은 바르기(귀얄분장)와 담그기(덤벙분장) 두 가지가 있다. 귀얄분장은 식물의 줄기나 동물의 털과 같은 재료로 만든 ‘풀비’ 형태의 넓고 굵은 붓으로 백토를 바르는 기법이며, 덤벙분장은 백토를 물에 풀고 기물을 담가서 입히는 기법이다. ‘덤벙’은 ‘크고 무거운 물건이 물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소리’를 뜻하는 의성어이다.

분청사기의 제작에는 백토분장을 바탕으로 선(線)·면(面) 상감기법, 인화상감기법, 박지기법, 조화기법, 철화기법 등의 다양한 시문기법이 사용되었다.

16세기 조선분청사기의 분장은 문양장식이 없이 백토만을 입히는 방향으로 변화가 진행되었고 덤벙기법으로 백토를 전면에 분장한 분청사기는 부드러운 표면질감과 색상으로 인해 마치 백자처럼 보인다. 이러한 분장의 변용에서 다양한 미감이 표출되었고 이는 인화분청사기의 ‘규격화된 단정한 맛’과 ‘정밀한 추상성’, 조화와 철화분청사기의 ‘회화적인 구성과 자유분방함’, 귀얄분장과 덤벙분장 분청사기의 ‘대범하고 활달한 신선함’ 등 상반된 의미의 미학적 평가로 응축되었다.

분청사기 粉靑沙器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니(白土泥)를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자기이다.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가 특징이다.

사기에 남긴 기록

분청사기는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세종연간(1400~1450년)에 한성부의 여러 관청과 지방관아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국용자기(國用磁器)이다. 공적인 용도의 분청사기는 각 도 군현의 자기소(磁器所)에서 사기장인호(沙器匠人戶)가 현물의 세금인 공물로 제작하고 해당 지방관부가 주관하여 중앙정부에 상납하였다.

세종연간인 1424~1432년에 자료조사가 이루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팔도의 자기소 139개소가 기록되었다. 자기소에서는 중앙정부가 지방관부를 통해 내려 보낸 공물 제작 지침인 견양(見樣)에 의거하여 사기장인이 형태, 크기, 문양 등이 규격화된 공납용 분청사기를 제작하였고 자기의 사용처인 관사명(官司名), 제작자인 장인명, 납부지역인 지명 등을 표기하였다.

관사명의 표기는 국용자기의 분실을 막기 위해 태종 17년(1417)에 사용처를 표기하여 관용물자임을 밝히도록 한 결과이다. 또 장인명의 표기는 세종 3년(1421)에 자기의 품질을 개선하고자 제작자를 표기하도록 한 결과이다. 사기장인은 구성원의 수에 따라 10~30명 내외의 대호(大戶), 중호(中戶), 소호(小戶)로 구분된 사기장인호(沙器匠人戶)에 속하였고 지방관부에서는 장인명부인 장적(匠籍)을 관리하였다.

06. 백토를 바른 장인의 손가락 자국(부산 기장 하장안 명례리 가마터 출토) ⓒ부산박물관 07. 귀얄분장 분청사기 부분(전남 고흥 운대리 가마터 출토)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 08. 손가락으로 백토를 바른 자국(부산 기장 하장안 명례리 가마터 출토) ⓒ부산박물관 09. 분청사기 덤벙 분장 발 ⓒ국립중앙박물관 10. 분청사기덤벙분장합. 16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한 조선 전기 도자기의 변화를 잘 보여 준다. ⓒ국립중앙박물관 11. 분청사기 덤벙분장 발. 높은 굽이 달린 발로, 겉면 전체를 덤벙기법으로 수수하게 장식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사기장의 자취, 선명한 지문

사기장의 이름은 막생(莫生), 막삼(莫三), 막동(莫同), 금동(今同), 아마도 있었을 돌쇠(石乙金)까지. 산골짜기 물길과 가까운 가마자리(窯址)에서 오백년이 넘는 시간의 강 위로 떠오른 한 글자, 두 글자, 더러는 성(姓)이 있는 세 글자로만 전해진다.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특별한 단 한 사람, 이 땅에 분청사기가 자취를 감춘 때에 백자를 만들었을 충주 사기장 한막동이 임진년(1592)에 발발한 난리 통에 왜의 첩자가 되어 중국 명나라 군대를 염탐한 죄로 목이 베이고 말아 사기장인의 일이 아닌 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접반사(接伴使) 서성(徐渻)의 장계를 보건대, 충주의 사기장 한막동(韓莫同)은 왜놈의 첩자가 되어 중국군을 염탐하였다고 하니, 대단히 흉악합니다. 즉시 목을 베어 효시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12일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도공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한 고유한 개체로서의 한 사람이 아니다. 더러는 양인이기도 하나 대부분 공천(公賤)이거나 노자(奴子)이거나 공천노자 아비와 양인 어미 사이에서 난 노자였다. 이 땅에서 귀하지 않은 신분으로, 특별할 것 없는 흔하고 비슷한 이름으로 살아갔으며 더러는 역사의 질곡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들은 귀하지 못한 신분 때문에 보통명사화한 기호(記號)로 깨진 파편에 화석처럼 박혀있다. 그러나 익숙한 분장의 자취로, 거침없는 손길로, 선명한 지문(指紋)으로 온통 뒤범벅된 가마터의 흔적에서 사기장인으로 오롯이 숨 쉬고 있다.

12.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선(線)·면(面) 상감기법(광주 충효동 가마터 출토) ⓒ국립광주박물관 13.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인화상감기법(충남 태안 마도 해역 인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14.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박지기법(광주 충효동 가마터 출토) ⓒ국립광주박물관 15. 청사기 장식기법 중 철화기법(충남 공주 학봉리 가마터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글. 박경자(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