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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을 담아 진리의 빛을 밝힌 석등
작성일
2019-04-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582

불을 담아 진리의 빛을 밝힌 석등 석등은 부처님 말씀인 진리의 빛으로 어두운 마음을 밝혀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법을 구체적인 상징적 조형물로 형상화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의 등불 또는 법신(法身)이라 표현한다. 석등은 등화(燈火)를 밝힐 수 있는 실용적 의미와 함께 등 공양의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마음을 정화하는 불

인류는 불을 이용하여 조명으로 사용하고 체온을 보존하고 짐승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하고 음식물을 익혀 먹는 등 많은 이익을 얻어왔지만, 불로 인해 화재나 전쟁 등 죽음이나 파괴의 상징으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불은 문명의 상징이라 하였다. 불을 사용하여 어두운 곳을 밝게 하기 위한 욕망에서 인간이 창조 개발해 낸 것이 조명구인 등(燈)이다. 이 등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은 잘 보존할 뿐만 아니라 이를 관리함으로써 만물의 영장이 되었으며 인류 생활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문명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석등은 나무와 달리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에서 인간이 자연 속에서 받아들여 개발한 기구이다. 신만이 만들 수 있다는 불을 스스로 관리하게 됨으로써 등은 인간 문명의 상징이 되며 그 석등(등화)은 신비적인 관념에서 연유한 종교적인 진리의 상징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찰이나 관가 등의 공공 건축물의 처마 끝에 달거나 마당에 기둥을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한 등을 장명등이라고 한다. 분묘 앞의 장명등을 일명 석등룡(石燈龍) 혹은 석등(石燈)이라고도 한다. 특히 분묘 앞에 장명등을 세우게 된 시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분묘에 석조물을 세우는 데는 피장자의 신분 혹은 품계를 기준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였고, 장명등의 경우는 일품재상(一品宰相)에 한하여 세울 수 있도록 한정하였다. 조선 왕릉에 등장하는 장명등은 불을 밝히기 위한 석등으로 『국조오례의·흉례(凶禮)』에 의해 ‘사방의 옆을 통해 파서 연기를 흩어지게 한다.’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실제로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명등에서는 불을 피운 흔적이 없어 상징적인 조형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명등은 초기에는 고려시대 왕릉과 같이 화사석의 평면이 사각형이었으나 이후에 팔각형, 사각형, 팔각형의 형태로 반복 변화되면서 화창도 장명등의 형태에 따라 사각, 팔각 또는 원형이었다. 특히 파주 공효공 박중손묘 장명등(보물 제1323호)은 화창이 매우 특이한 형태를 지녔다. 전면과 후면은 네모난 창을 하고 동쪽은 둥글게, 서쪽은 초승달 모양으로 화창을 두어 지(地)·일(日)·월(月)을 상징한 형태이다. 정경부인묘 앞의 장명등은 이보다 가늘고 길면서 화창을 모두 네모나게 만들어 대조적이다.


지혜의 빛 발하는 석등

불교에서의 석등은 일반적으로 등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표현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등지인연경(燈指因緣經)>에 의하면 “불타(佛陀)의 진리인 광명은 암흑과도 같은 사바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불신(佛身)의 광명이 비치는 등명(燈明)으로 촌각도 지체 없이 선(善)한 경지로 인도하는 선봉이 된다.”고 하였다. 석등은 부처님 말씀인 진리의 빛으로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법을 구체적인 상징적 조형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의 등불 또는 법신(法身)이라 표현한다. 석등은 등화(燈火)를 밝힐 수 있는 실용적 의미와 함께 등 공양의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사찰에서의 석등은 분묘나 마당에 세운 장명등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장명등과 비교하면 더 오래전부터 사찰의 법당 앞에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불교가 이 땅에 전해지던 삼국시대에 신앙의 대상물 앞에 불을 밝히기 위해 백제의 큰 사찰이었던 미륵사에서 팔각 연화문이 새겨진 하대석을 바탕으로 석등이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에 넘어와서 다종다양한 형태의 석등으로 발달하였다. 정형적인 석등 양식으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을 들 수 있으며, 또한 고려시대에는 혁신적인 형태의 석등을 개발, 발전시켜오면서 승려의 승탑 앞과 능묘를 밝히는 장명등의 형태로 확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찰 전용으로 사용하던 석등이 조선왕조의 능과 사대부들의 묘에 설치하는 풍습으로 전환되어갔다.

석등은 등화(燈火)를 밝힐 수 있는 실용적 의미와 함께 등 공양의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시대에 따라 변화된 말씀의 빛, 석등

석등의 기본적인 구조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하대석 위에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놓고 화창석을 받치게 하고 그 위에 지붕돌을 덮고 상륜부에 보주를 올렸다. 그래서 석등은 아래쪽에서부터 위쪽까지 수행과정에 비유하는데, 팔각은 팔정도를 의미하고, 4개의 화창은 사제(苦, 集, 滅, 道)를 의미한다. 화사석에서 나오는 불빛은 불광(佛光:佛法)을 상징한다. 상하대석에 조각된 앙련과 복련은 불자들의 신행목표인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형상화한 것이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의 아픔을 살핀다는 뜻이다. 시대에 따라 화사석에 보살상이나 사천왕상을 새겼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은 화사석에 보살상을 새겼다. 통일신라시대의 기본인 석등 외에도 간주석 대신 쌍사자가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이형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형석등으로는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과 방형양식인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 등이 대표적 석등이다. 특히 법주사 쌍사자 석등의 사자는 절대적인 힘과 위엄을 갖춘 동물로 생각했다. 원래 사자를 사자 ‘산(狻)’자에 사자 ‘예(猊)’자를 써서 ‘산예(狻猊)’라고 불렀다. 猊는 부처가 앉는 자리나 고승이 앉는 자리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사자를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영물로 보고 있다.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다. 빛을 소중히 모신다는 의미이다. 사자 한 마리는 입을 벌려 ‘아(阿)’ 소리를 내고 또 한 마리는 입을 다물어 ‘흠(欠)’ 소리를 내고 있다. 두 소리가 합쳐야 비로소 완성된 소리가 된다. 시작과 끝, 생성과 소멸, 영혼과 완성, 성취를 뜻하는 ‘옴’이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쌍사자 석등은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 등이 있으며, 고려시대 석등은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제282호)은 사자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찰이 아닌 승탑으로 나타난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호)이 있다.

고복형 석등은 기본형의 팔각 중대석이 원통형으로 바뀌었으며, 원통형 석주에 마치 장구와 같은 굵은 마디가 있다. 통일신라 후기 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이 석등의 대표작으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제34호) 등이 있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팔각 중대석(간주석)이 고복형으로 바뀌고 지붕돌에 귀꽃이 생기기 시작한다. 논산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이나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사자 석등(보물 제656호)처럼 화사석이 4각 6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밖에 화엄사 연기조사 석등은 간주석 대신에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왼쪽 무릎을 세운 채 차(茶)를 바치고 있는 석상이 석등을 떠받치고 있다.

『불설시등공덕경(佛設施燈功德經)』에서는 “비록 신심이 없어 여래를 비방하던 자라도 등불을 받들어 올리면 현세에 3종의 맑은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임종할 때는 3종의 밝은 마음을 얻고, 4종의 광명을 볼 수 있다. 죽어서는 33천에 태어나며 다섯 가지 청정함을 얻을 수 있다”고 등(燈) 공양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01. 보물 제1323호 파주 공효공 박중손 묘 장명등은 화창이 매우 특이한 형태를 지녔다. ⓒ문화재청 02. 보물 제389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석등 간주를 대신하여 쌍사자 모양의 간석을 두었다. ⓒ문화재청 03.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통일신라시대에는 형태의 석등의 형태가 다종다양하게 발전하는데, 정형적인 석등 양식으로는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을 들 수 있다. ⓒ이미지투데이

글. 정진해(한국능력교육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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