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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꽃’이 피고 진 그곳, 공주 고마나루
작성일
2019-07-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936

‘녹두꽃’이 피고 진 그곳, 공주 고마나루 민초들의 혼과 애환이 살아 숨 쉬는 공주 고마나루 “이제 곧 전투가 벌어질 터인데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전투를 앞두고 있는 동학군의 백이강(조정석)에게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이 묻는다. 그러자 백이강은 동학군이 등뒤에 붙이고 다니는 ‘궁을(弓乙)’이란 글자를 들어 “총알도 피해간다는 부적이 등짝에 붙었는데 겁날 게 뭐냐”고 되묻는다. 그러자 전봉준은 그 부적에 적힌 글자의 의미를 이야기해준다. 그건 “한없이 약하고 더없이 힘없는 진짜 약자”란 뜻이란다. 그 말에 백이강이 싸우러 가는 사람한테 고약하다며 투덜대자, 전봉준이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항상 약자였다”고.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SBS 드라마 <녹두꽃>은 여러모로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의 시대적 변화를 읽게 만드는 드라마다. 지금껏 많은 사극들이 왕조 중심의 이야기들을 주로 다뤘던 것과 달리, <녹두꽃>은 사실상 현 민주주의의 시작점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민초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서다. 한때는 ‘횃불’이란 단어조차 민감했던 시기가있었지만, 지금은 ‘촛불’ 이전에 ‘횃불’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민중의식이 성숙해졌다. <녹두꽃>은 그래서 단지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이라는 한 영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거시기’로 불리다 백이강이라는 이름으로 이 혁명의 전면에 뛰어든 한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민초들의 열망과 성숙, 좌절 등을 그리고 있다.


‘녹두꽃 ’과 함께 피어나고 있는 공주 고마나루

<녹두꽃>과 함께 당시 동학농민혁명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다. 지금껏 소외되어 오다가 지난해 겨우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었던 5월 11일 마침 드라마가 황토현 전투를 다룬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5월 11일이 기념일이 됐던 건 바로 그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이겼던 황토현 전투 전승일이었기 때문이다. 전라도 고부에 부임한 조병갑의 비리와 폭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해 전주로 넘어왔다가 관군과 화약을 맺고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게 되면서 다시 봉기한 동학군 이 서울 진입을 위해 공주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일련의 이동 과정을 겪었다. 여기서 중요한 전적지로서 주목받는 곳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을 끝장냈던 우금치 전투가 벌어진 공주 명승 제21호 고마나루(곰나루)다.

01. 동학농민혁명을 끝장냈던 우금치전투가 벌어진 명승 제21호 공주 고마나루의 곰사당 ⓒ문화재청 02, 03. 사적 제387호 우금치 전적.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 를 일으킨 곳이다. ⓒ문화재청

우금치는 소 우(牛)자에 금할 금(禁)이 더해진 이름을 가진 고개로, ‘소를 금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 건 옛날 이 고개에 도적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가 저문 뒤에는 소를 몰고 고개를 넘어가는 걸 금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 우금치가 동학군 최후의 전투지가 되었던 건 그곳이 충청도의 중심지였던 공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공주시 남쪽에 있는 이 고개에서 동학군은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뛰어난 화력을 가진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대패하고 만다. 전투가 아니라 학살에 가까웠다는 이곳에는 그래서 당시 희생된 이름 없는 녹두꽃 즉 동학군을 위한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패색이 짙어진 동학군을 전봉준은 해산했고, 결국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우금치 전투의 패배가 사실상 동학농민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우금치 전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으로 공주시 향토문화제 용못 송장배미가 있다. 공주 시내에서 고마나루로 이어지는 길, 금강변에 못 미쳐 닿는 용못은 ‘강물은 말라도 용못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지는 연못이다. 이 연못에 당시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한 동학농민군들이 빠져 죽었다 해서 ‘송장배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동학군들의 피해는 그 주검이 계곡을 가득 메웠고 피는 금강까지 붉게 물들였다고 할 만큼 참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혼이 서린 곳. 그렇게 고마나루는 민초들의 역사가자연 풍광 속에 스며 있는 곳이다.

고마나루 전설에 담긴 웅진의 꿈과 한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 금강변 나루 일대를 일컬으며 ‘곰나루’라고도 불린다.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고, 한자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熊津)’이다. 475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지만, 538년 성왕은 수도를 다시 사비(부여)로 옮겼다. 사비로 수도가 옮겨가기 전까지 웅진은 삼국시대 마한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곳이었다.


04. SBS 드라마 <녹두꽃> 포스터 05.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하였던 전봉준 ⓒ위키백과

고마나루라는 지명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단군신화처럼 곰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아득한 옛날 한 나무꾼이 연미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여자로 변신한 암곰을 만나 굴속으로 들어갔다. 곰은 좋은 음식을 가져다주며 나무꾼을 보살폈고, 사냥을 하러 갈 때면 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 나무꾼이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세월이 지나 자식이 둘이나 생기자 안심한 곰은 굴 입구를 돌로 막지 않은 채 사냥을 나갔고 결국 나무꾼은 강 건너편으로 도망쳤다. 곰은 돌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나무꾼은 냉정하게 돌아섰고, 상심한 곰은 두 자식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후로 배가 지날 때마다 이곳에는 풍랑이 일고 변고가 생겨 곰 사당을 지어 영혼을 위로했다는 전설이다. 공주시는 매년 음력 3월 열엿새 날을 전후해 연미산 암곰과 새끼 곰들의 원혼을 달래고,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마나루 수신제’를 지내고 있다. 백제시대부터 국가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던 이 수신제는 일제강점기에 폐지됐다가 1998년 계룡산 산신제가 복원되면서 다시 개최되고 있다.


공주에는 곰에서 유래된 지명들이 많다. 고마나루 근처의 공산성은 본래 곰나루 지역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곰산성’으로 불리다 한자로 옮겨 적으며 공산성(公山城)이 되었다고 하며, 공주라는 지명 역시 ‘곰주’로 불리던 이름이 공주(公州)라는 한자 표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항간에는 고마나루에 얽힌 전설이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가 천도된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는 해석도 나온다. 수도 이전에 따른 어려움을 겪던 웅진 사람들을 위무하는 내용을 신화가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주 고마나루는 백제 수도의 관문으로서 여러 역사적 사건들의 주요 무대가 되어왔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거슬러 와 주둔했던 곳이었고, 백제 멸망 뒤에는 웅진도독부가 설치 되었던 곳이었으며 또 동학군이 서울로 가는 요충지로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했다. 1945년 큰 장마로 인해 고마나루 일대의 모래가 쓸려 나갔는데 그 자리에 가로세로로 쌓은 건물의 흔적들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오래전부터 많이 이들이 모여 살았던 백제 역사의 중심부였다는 것이다.


06, 07. 명승 제21호 공주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 주의 마을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문화재청



금강변의 넓은 백사장과 솔향이 바람에 묻어나는 솔밭, 그리고 나루 북쪽 연미산의 자태가 어우러진 고마나루는 물론 그 자연경관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솔숲을 지나 금강의 모래사장을 걷는 그 길은 지친 도시인들을 편안하게 끌어안아준다. 하지만 고즈넉한 풍광 속에서도 그곳은 민초들의 혼과 애환이 느껴지는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한때 백제의 수도였지만 떠나버린 나무꾼처럼 이전된 수도로 힘겨워했을 민초들과, 요충지로서 많은 이들이 차지하려 했고 그래서 스러져갔을 이름 없는 민초들의 혼이 서린 곳. 그렇게 고마나루는 민초들의 역사가 자연풍광 속에 스며 있는 곳이다.



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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