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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식인의 나라, 조선의 서쾌
작성일
2015-04-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8498

지식인의 나라, 조선의 서쾌. 조선은 지식인의 나라였다. 곧 문학과 역사, 철학을 자기 교양으로 삼은 지식인들이 지배층이었던 나라였던 것 이다. 지식은 책을 통해 유통되었기에 우리는 당연히 책을 유통시키는 시스템을 떠올릴 수 있다. 오늘날 그 시스템의 중심에는 서점이 놓여있다. 하지만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서점은 아무리 빨라도 18세기 말 아니면 19세기 초에서야 서울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시대 서적 중개상

조선시대에 책은 주로 국가, 곧 관官에서 금속활자나 목판으로 인쇄하여 공급하였다. 그 책은 매우 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아무나 원한다고 쉽게 가질 수 있 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구했던가. 목판을 보유하고 있는 고을의 원님이 된 친구에게 부탁하여 다시 찍어내거나, 다른 사람을 책을 빌 려 베끼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책과 교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 었다. 그리고 이 외에 한가지 방법이 있었다. 서쾌書, 곧 책 거간을 통해 책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서쾌는 책을 팔고자 하는 사람과 사고자 하는 사람을 연결시켜 주기도 하고 혹은 자신이 책을 사두었다가 사려는 사람을 찾아팔기도 하였다. 서쾌의 존재는 문헌상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최초로 보인다. 물론 『미암일기眉巖日記』이전의 문헌에 매서인賣書人, 곧 ‘책 파는 사람’이 란 말 이 몇 곳에 나오기는 하지만 이는 중국 북경의 매서인을 지칭한 것이다. 조선의 매서인은 아니다.

02.『김홍도필풍속도화첩』(보물제527호) 중<행상>. 19세기말 책을 가지고 다니며 파는 잡화 행상인이 있었다. ⓒ문화재청 03. 일제강점기 조사자료에 실린 1920년 대거리의 책방.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04. 『 호산외사』. 조선후기에 조희룡(趙熙龍)이 엮은 인물 전기집으로 조신선등의 기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책을 화매和賣하는 사람이 다수 보인다. 화매는 ‘파는 자가 사는 자와 값을 합의해서 파는 행위’다. 곧 책을 팔려고 하는 사람과 사려고 하는 사람 사이에서 책값을 절충한다. 가격 절충이 이루어지면 책의 대금이 지급되고 책이 오간다. 이 과정이 끝나면 ‘중개인’에게 ‘행하行下’ 곧 수수료를 준다. 이 책 중개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곧 서쾌다. 다만 이 서쾌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또 얼마나 활동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길이 없다. 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자료는 1576년 에 찍은『고사촬요攷事撮要』란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수표교 아래 북쪽 두번째 동리문 안에 있는 하한수가河漢水家에서 판에 새긴 것이다.사고 싶은 사람은 찾아오시오.’ 임진왜란 직전 드디어 민간에서 책을 찍어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한데, 아마도 이런 사람이 나타났다면 서적 판매의 중개인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05. 『 미암일기』(보물 제260호). 문헌상 서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서쾌의 활약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에는 분명 서점이 출현했을 것이고, 서적의 상업적 판매 역시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그리고 이어 일어난 병자호란은 조선전기까지 쌓아올린 서적문화를 일거에 붕괴시켰다. 그 결과 서점은 출현하지 않았고 서울시정을 떠돌며 서적 판매를 중개하는 서쾌가 여전히 활동하였다. 물론 서쾌의 문헌적 증거는 흔치 않다. 문인들의 문집에 서쾌란명사가 이따금 등장하지만, 서쾌에 대한 어떤 일반론을 이끌어낼 정도는 아닌 것이다. 다만 1771년(영조 47) 청淸의 문인 주린朱璘이 쓴『명기집략明紀輯略』에 태조와 인조를 모독한 문구가 있다 하여 이 책 의 소장자와 판매자를 모두 잡아들여 치죄한 사건에 서쾌에 대한 자료가 다수 나온다. 영조는 이 사건에 대 해 언급하던 중 ‘책 쾌(冊, 곧書)가 도성都城안에 가득하다’ 하였고, 『 명기집략明紀輯略』판매에 관계된 서쾌 8명을 흑산도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같은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서쾌가 1명이 있으니, 전체 서쾌는 모두 9명이다. 그런데 청나라 주린朱璘의 문집인『청암집』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체로 뙤약볕 아래서 거의 죽게 된 역관譯官과 서쾌로서 거의 죽게 된 자가 1백 명에 가깝다고 했는데, 며칠 뒤 역관 50여 명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제외하면 서쾌는 아마도 50여 명을 넘었을 것이다. 또 이때 달아난 서쾌가 적지 않았으니 영조 시대에 이미 50여 명을 훌쩍 넘는 서쾌가 서적의 유통에 개입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명기집략明紀輯略』사건에서 보듯 서쾌는 서적의 매매를 중개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한 책을 역관을 통해 구입하여 다시 팔고 있었다. 또 조선 후기 수많은 정변政變으로 몰락한 경화세족京華世族가문에서 쏟아져 나온 책들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서쾌를 통해 사족가의 책이 주인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서쾌로는 조신선曺神仙, 유재건(劉在健, 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나오는 홍윤수洪胤琇등이 있다. 서쾌는 조선조 내내 있었고 조선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물론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방 이후까지 활동한 송신용(宋申用, 1884~1962)을 마지막 서쾌로 보기도 한다. 첨언하자면 송신용은 『한양가漢陽歌』를 주해하기도 하였다. 단순한 책장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글.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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