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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의 수중고고학
작성일
2019-10-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482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은 전남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신안선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신안선은 1975년 어부의 그물에 청자화병이 걸려 올라오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1976년 부터 1984년까지 9년간 11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발굴조사 결과 중국 원나라 선박 1척과 2만 3천여 점의 유물, 28톤의 동전, 자단목 1,017점 등이 확인되었다. 그중 대부분은 룽취안요(龍泉窯) 징더전요(景德鎭窯) 등에서생산된 도자기로 당시 언론은 앞다투어 신안선 발굴의 성과를 보도하였다. 01. 청자매병 수중 매몰 상태 02. 마도4호선 발굴조사 모습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은 신안선의 발견으로 화려한 서막을 열었지만, 신안선 발굴 이후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공백 기간을 거쳐야 했다. 신안선 발굴 당시 수중조사는 해군의 해난구조대(SSU)가 전담하였고, 9년이라는 긴 조사기간 동안 수중발굴 전문인력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안선 발굴이 막바지였던 1983년과 1984년 전남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서 고려청자를 실은 완도선이 발굴되었고 1995년과 1996년 무안도리포에서도 수중발굴조사가 있었지만 해난구조대가 수중조사를 전담하는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신안선 선체 보존처리를 위해 1981년 목포보존처리장이 개설되었다는 점이다. 이 목포보존처리장은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와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거쳐 현재 우리나라 수중문화재 발굴조사를 전담하고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이 체계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청으로 승격한 1999년 그 시기부터이다.


당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자체적인 수중조사 역량을 갖추겠다는 목표 아래 측면주사음파탐지기와 지층탐사기를 확보하여 탐사기반을 갖추고, 수중조사원을 확보하기 위해 직원에 대한 잠수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비록 어선을 빌려서 시작했지만, 1999년 고창 까막섬, 2000년 고흥 시산도, 영광 원자력발전소 앞바다에서 처음 자체적인 탐사를 실시하였다.


이런 준비과정을 통해 역량을 축적하던 차, 2002년 군산 비안도 앞바다에서 어부가 청자더미를 발견하면서 비안도 수중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조사는 2002년과 2003년 5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국립해양유물 전시관은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사원이 직접 입수하여 유물매장 상태를 확인하고, 촬영 기록을 남기는 등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해군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진행한 최초의 수중발굴조사였다. 비안도 발굴이 끝난 그해 겨울,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또다시 수중 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이후부터는 몇 년에 한 차례씩 이루어지던 수중발굴조사가 매년 끊이지 않고 실시되었다.


2007년 한국 수중고고학은 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2007년 3월, 국립해양전시관에 수중문화재 조사를 전담하는 ‘수중발굴과’가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달, 해남 금호호 탐사에 수중문화재 탐사전용선인 씨뮤즈호가 처음으로 투입되었다. 이전까지 항상 어선을 빌려 수중조사를 실시했던 열악함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화답하듯 2007년 5월, 태안 대섬에서는 어부의 그물망에 잡힌 주꾸미가 고려청자를 물고 올라옴으로써 수중발굴의 새로운 역사가 쓰이게 되었다. 당시 상황 파악을 위한 긴급탐사가 실시되었는데, 탐사결과 수심 12m에서 수많은 청자가 확인되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청자 발견 해역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잠수행위를 금지시킨 뒤인 7월부터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섬 발굴에서는 23,000여 점의 청자와 고려청자 운반선인 태안선이 발굴되는 등 엄청난 성과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수중문화재의 중요성을 다시 알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 시기에 군산 야미도에서 실시된 발굴 역시 한국 수중고고학 발달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다. 야미도는 도굴범 검거를 계기로 알려지게 된 유적으로, 2006년과 2007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12세기의 조질 청자가 다량 출수되었다. 태안선 발굴후 2008년에는 3차 발굴이 실시되었는데, 이 3차 발굴에서 수중발굴에 필요한 장비의 개선이 많이 이루어졌다. 먼저 발굴에 필요한 바지선 2대가 새로이 건조되었다. 새로운 바지선은 14×16m 크기로 제토, 잠수, 유물분류 등 수중조사에 필요한 전반의 작업이 가능했다. 장비 역시 우리나라 환경에 맞도록 개선되었다.


태안선 발굴 성과와 야미도 발굴에서 축적된 기술은 이후 마도해역의 수중 발굴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마도해역에서는 2009년 마도1, 2, 3호선이 연이어 발견되어 해마다 수중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마도1,2, 3호선에는 기존에 발견되었던 고려시대 도자기 운반선과 달리 곡물과 젓갈 등 다양한 물품들이 발견되었으며, 이 물품들이 어디로부터 와서 누구에게 보내는지를 알려주는 목간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굴 성과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이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2013년에는 수중고고학에 있어 또 다른 큰 도약이 있었다. 수중문화재 발굴선인 누리안호가 처음으로 발굴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누리안호는 290톤 규모의 선박으로 제토 장비, 유물 인양과 보관설비, 잠수조사 중의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비한 감압챔버(잠수 시 공기압을 조절하는 시설) 등 수중발굴에 필요한 장비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누리안호를 이용하여 인천 영흥도선, 진도 명량대첩로해역, 마도4호선 수중발굴조사를 수행하였다. 특히 마도4호선은 바다에서 발견된 최초의 조선시대 선박이자, 당시 세곡을 운반하던 조운선으로 확인되었다. 이런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2018년에는 태안 마도해역 앞 신진도에 태안해양유물전시관이 개관하여 그동안 태안해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신안선 발굴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수중고고학이 시작된 지 40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신안선 발굴이후 한국 수중고고학은 긴 시간 간헐적인 조사만 있었을 뿐 학문적인 연구와 경험을 축적하지는 못하였다.


실질적인 성장은 20년 전 1999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처음 자체적인 조사를 시도하면서부터이다. 그러고 보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성장이 있었던 셈이다. 조사 선박이 2척이나 생겼고, 발굴과 탐사에 부족함이 없는 장비도 갖추어졌다. 현재는 스리랑카, 베트남 등 여러 국가에서 수중발굴조사 지원을 요청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은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수중발굴을 하겠다는 집념만으로 과감히 물속으로 뛰어든 조사원들의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에서 여전히 부족한 것이 바로 조사원이다. 현재 수중에서 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조사원은 두 손에 꼽을 수 있다. 20년간 빠르게 성장한 한국 수중고고학이 앞으로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후배들을 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조사인력을 교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해외 수중발굴조사 등을 통해 보다 많은 조사 기회를 개발하고자 노력할 계획이다.


글. 사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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