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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족 해방을 넘어 인류의 자유를 꿈꾸다
작성일
2019-09-03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602

 

열 해를 갈고 나니/칼날은 푸르다마는/쓸 곳을 모르겠다./(…)/푸른 날이 쓸 데 없으니/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미완성 유고시를 들여다보면 단재의 모습이 또렷해질 것 같은데 오히려 연기처럼 풀어져 흩어진다. 도대체 범접하기 힘든 저 초탈한 정신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1910년 평북 정주 오산학교, 선생이 망명길에 들러 며칠 머물던 방에 담배연기가 자욱해 사람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는 이광수의 회고처럼, 단재의 삶과 행적은 대개 안개속의 그것처럼 선명하지 않다. 언론인으로서 역사학자로서, 의열한 독립운동가로서 집필한 글들이 하나같이 논지가 분명하고 확신에 차서 천둥 같고 우레 같으며, 만주 벌판이 좁고 백두가 낮아 한스러울 만큼 넓고 우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칼날 위를 걷듯 엄혹한 시절을 살았던 까닭이 크겠거니와 당신 스스로 일의 전후를 밝힌 것도 적으니, 저작물이 발표된 때와 벗이며 동지들의 글을 더듬어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의 면모를 그려볼 뿐이다. 그게 오죽하겠는가. ‘서서 세수하는 사람’ 이라고 알려진 선생의 대표적 이미지 또한 이광수의 글 내용이 과장되어 와전된 것이니 단재가 그 말을 들었다면 정색을 하고 묻지 않았을까 싶다. 왜 그러시겨오?라고.  01.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위키백과

1) 신채호가 망명하던 해 이광수는 오산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문명을 떨치던 단재의 방문에 환영회까지 열었던 모양이다. 이광수는 후에 「탈출 도중의 단재 인상」이란 글에서 이 무 렵을 회고했다. 이광수는 단재를 ‘하얀 얼굴에 코 밑에 까만 수염이 약간 난 극히 초라한 샌님이었다’고 묘사했다. 풍채가 좋은 편도 아니었고 행색도 볼품없었으나 눈빛만은 비범했다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듯 이상한 빛을 가진 눈이었다고 적었다. 특히 이광수는 단재가 세수하는 습관이 인상적이었는지 모두들 ‘큰 구경거리로 여겼다’고 회고했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든 채로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이 있었’고, 그래서 ‘마룻바닥과 자기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온통 물투성이를 만들었다’고. 사람들이 핀잔을 주어도 “그러면 어때요?” 하고 세수하는 법을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왜놈들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서 서 세수를 했다는 말은 이 내용이 와전된 것이다. 사실인즉 그렇다는 것이고, 이야기라는 것이 전해지는 동안 과장되고 덧붙는 일이 흔하거니와, 나라 잃은 백성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지어낸 이야기라면 더더욱 탓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02. 뤼순형무소 복역 중인 신채호 모습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도리미에서 고두미, 고두미에서 서울까지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 대전광역시로 편입되기 전엔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리미 마을. 고령 신씨 집성촌인 청주시 가덕면 청용리에 살던 신채호의 조부 신성우가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처가인 안동 권씨 문중의 훈장으로 초빙되자 아들 내외를 솔가하여 이주했던 곳이다. 신성우가 복직되어 서울로 올라가던 해, 1880년 겨울 그 도리미 마을에서 신채호가 태어났다. 생계가 막막해진 데다가 아들 신광식의 지병이 깊어지자 신성우는 고향 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족을 이주시켰는데, 그곳이 현재 신채호의 묘소가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속칭 고두미 마을이다. 신채호가 3~6세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성균관에 입학하여 상경할 때까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곳 이니 고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신채호는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서당을 운영하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부친 신광식이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어린 신채호에게 조부는 부친이자 스승이었다. 조부 문하에서 한문학의 체계를 갖추고, 인근의 학자 신병휴, 신승구와 천안의 신기선을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신학문을 수학했다. 1901년 성균관을 마치고 스물두 살의 원숙한 청년이 된 신채호는 고향에 내려와 신규식, 신석우 등과 함께 문동학교와 산동학원으로 이어지는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기자가 되어 다시 상경했다. 이후 1907년 조부가 사망하자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고 떠난 후로는 살아서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하루하루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돌보는 일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집안을 돌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친은 물론 조부의 묘소까지 다 잃어버렸으니 그 삶의 격렬함과 신산함은 필설로 옮기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02. 뤼순형무소 복역 중인 신채호 모습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언론구국 운동의선봉에 서서


<황성신문>에서 일하게 된 것은 신채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성균관 수학 시절부터 이미 남다른 문재(文才)를 드러냈고, 또 독립협회 운동 가담으로 잠시나마 투옥의 경험도 맛보았던 터였다. 가야 할 길이라 판단하고 방향이 정해지면 거침이 없었다. 다양하고 특이한 논설을 쏟아내는 한편 양기탁, 이회영, 안 창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긴 신채호는 수많은 시론과 사론을 집필하며 국권수호를 위한 민중계몽과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언론 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다.



신채호는 수많은 시론과 사론을 집필하며 국권수호를 위한 민중계몽과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언론 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다.


중국 망명생활과 고대사 연구


1910년 4월, 신채호는 망명길에 나섰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정주를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품속엔 안정복의 저서 『동사강목』 한 질뿐, 고단한 망명생활을 받쳐주기엔 너무도 단출한 짐이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베이징 등지를 전전하는 형편에도 학원을 세워 교육하고,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논설을 집필하여 국내외 언론에 발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면이 아쉬우면 신문을 만들었고, 필요하면 잡지를 창간해서 주필을 맡았다. <권업신문>이 그러하고, 박달학원이 그러하고, <천고>, <신대한>이 그러하다.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무수한 역사논문을 집필했거니와 명저 『조선상고사』 또한 그런 노역의 결실이다. 뿐만 아니라 「꿈하늘」, 「을지문덕전」 등 소설을 써서 민족자강 사상과 항일투쟁 의식을 고취하고자 애쓴 문학인의 면모도 뚜렷하다.


04.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 도리미 마을에 복원된 신채호 생가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05. 사당 뒤편 언덕 너머에 새롭게 조성된 신채호 묘소. 묘비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특히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기초하여 1923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은 신채호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라고 시작하여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끝맺는 선언문에는 절정에 달한 신채호의 사상이 집약돼 있다.


1928년 신채호는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외국 위체의 위조 및 환전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다. 뤼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 측이 병보석 출감을 통지했으나 친일 인사의 보증이라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하고, 결국 뇌일혈로 쓰러져차디찬 감방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1936년 2월, 향년 57세.



06. 1921년 신채호가 북경에서 창간한 잡지 <천고> 창간호 표지. 심산 김창숙과 함께 발행에 진력하며 민족독립 사상이 담긴 논설과 사론을 집필하였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07.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 조성된 신채호 사당 ⓒ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조국의 광복 , 그리고 전 인류의 자유


신채호는 한학으로 몸을 일으킨 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틀에 갇히지 않고 열린 세계를 지향했고, 끊임없이 ‘비아(非我)’와 투쟁하며 자신을 변혁함으로써 마침내는 아나키스트로 몸을 마쳤다.

“나의 눈은 해가 되어/여기저기 비치우고지고/님 나라 밝아지게./
/너의 피는 꽃이 되어/여기저기 피고지고/님 나라 고와지게./
/(…) 살이 썩어 흙이 되고/뼈는 굳어 돌 되어라./님 나라 보태지게.”
(시 「너의 것」부분)—

오직 조국의 광복과 겨레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전 인류의 해방과 자유를 꿈꾸는 데까지 나아간 정신 앞에 서면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신채호의 순국 소식을 들은 홍명희는 곡한다.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곡 단재」 중)— ‘아름답다’는 말,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인 그 순정한 사내 앞에 쓰이지 않는다면 그 말이 생겨난 보람이 있을까 싶다.



글. 류정환 (시인,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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