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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문화재의 뒤안길(98) 경주 남산 (서울경제, '21.7,5)
작성자
김동하
게재일
2021-07-05
주관부서
대변인실
조회수
956

문화재의 뒤안길(98) (서울경제, '21.7.5)



경주 남산, 수행자의 공간

    

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사찰팀 김동하 전문위원

 

경주 남산은 최고봉의 이름을 따 금오산이나 고위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남산 앞에 ‘신라불교문화재의 보고(寶庫)’,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 ‘민중신앙의 산’과 같은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계곡 곳곳에 산재한 다수의 불교유적(불상·석탑 등)은 남산이 이러한 별칭을 얻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는 오늘날 우리에게 비친 남산의 모습이다. 다양한 수식어 때문에 생긴 막연한 기대와 경외심은 오히려 남산의 역사적 의미를 알아가고 증명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남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시대 사람의 눈으로 남산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경주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 보물.jpg

 

남산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왕경(王京)에 위치한 단일 산록에 다수의 불교유적이 밀집·분포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계곡에 많은 불상과 탑이 짧은 거리를 두고 입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어떤 탑상(塔像)은 도저히 사람이 거주하거나 생활하기 어려운 장소에 조성된 예도 있다.

발굴로 확인된 삼릉계나 열암곡 불교유적도 많은 사람이 장기간 머물면서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환경조건은 아니었다.

즉 남산에 입지한 다수의 불교유적은 왕경의 평지사찰이 가지는 예불이나 강설, 의례, 생활 등을 모두 할 수 있는 종합적인 공간과 기능을 가지기에는 어려운 환경들에 입지해 있다.

그렇다면 왜 평지가 아닌 험한 산지에 있었고, 왜 그것도 하필 남산에 그 많은 탑과 불상이 조성됐을까?

신라 원효스님이 저술한 불교서인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는 험한 산과 높은 바위, 푸른 소나무와 깊은 골짜기에 지혜로운 사람과 수행하는 이가 머문다고 이야기한다.

신라시대 남산도 ‘수행자의 공간’이자, 수행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산에 이러한 수행처가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①왕경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다는 점, ②자연환경(돌산) 때문에 탑이나 불상을 만들기 쉽다는 점, ③ 세속과 떨어져 수행을 증진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다고 남산의 불적이 왕경의 평지사찰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운영되지는 않았던 거 같다. 평지의 본사와 산지의 수행처가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속 충담사(忠談師)의 일화처럼 스님은 평소 본사에 기거하면서 특정 시기나 기간에만 남산의 불적에 올라가 수행 증진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에 관해서는 앞으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경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 보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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