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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 우리의 용기와 투쟁 정신을 보여준 어재연 장군 수자기
작성일
2021-05-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722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 우리의 용기와 투쟁 정신을 보여준 어재연 장군 수자기 호국의 달 6월, 강화역사박물관에서 특별한 유물을 공개한다. 바로 신미양요 당시 쓰였던 ‘수자기’이다. 가로, 세로 4m가 넘는 이 거대한 깃발은 현존하는 유일한 장수기다. 역사의 비극 속에 펄럭였던 이 깃발엔 우리의 투쟁 정신이 담겨 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아픈 역사의 결과를 마주하고 있기도 하다. 01.수자기 ⓒ강화역사박물관

투쟁 정신과 역사의 이면 엿볼 수 있는 장수의 깃발

수자기는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혀있는 깃발로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이다.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수자기는 가로, 세로 4m가 넘는 대형 깃발로 현존하는 유일한 장수기이다. 이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진무영 중군에 임명된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를 본진으로 하여 미군과 전투할 때 사용했던 깃발이다. 그 당시 미군의 근대적 군사력에 밀려 광성보는 함락당하고 말았고 수자기는 이때 전리품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7년, 떠난 지 136년 만에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수자기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나라를 위해 열악한 무기로, 무기가 없으면 흙을 뿌리면서라도 싸웠던 조선병사들의 용기와 투쟁 정신을 상징한다. 그와 동시에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웠던 우리 역사를 담은 귀한 자료이다.


근대 시기 역사의 아픔이었던 신미양요의 흔적

한반도의 관문이자 한강을 통해 수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강화는 그 지정학적 위치상 19세기 후반, 새로운 문명세력과 충돌이 빈번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이 모두 강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중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1871년 5월 16일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5척의 아시아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출발했다. 3일 후 충청도 해미 앞바다에 도착한 미군은 한동안 강화해협 주변에서 지형과 수로를 탐측하였다.


그 당시 조선은 병인양요 후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가 더욱 높아졌을 때로 조선 정부는 콜로라도호로 관리를 파견하는 등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 1일 탐측대는 강화 손돌목에 도착하였고 허가없이 진입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 조선군 수비대는 집중 포격을 가하였다. 다음날 조선 정부는 어재연을 급파하여 미군을 저지하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손돌목에서 가한 포격에 잠시 퇴각하였던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한 뒤 6월 11일 광성보로 진격하여 전면전을 전개하였다.


죽기를 각오한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싸웠지만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광성보는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미국 측 기록에 따르면 미군은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비롯한 243명의 전사가 발생하는 큰 희생이 있었다. 그 당시 미군이 본국에 전한 기록 곳곳에서 도망가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운 조선군의 용기와 애국심에 경의를 표한 것을 볼 수 있다. 미 국무부에서는 이러한 전투가 통상조약체결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결국 7월 3일 조선 해역에서 철수하면서 신미양요가 끝났다.


02.1871년 6월에 콜로라도호에서 찍은 수자기 ⓒ문화재청 03.수자기 부분 Flag over Fort mckee (광성보 미국식 이름), Corea June 11, 1871 The chinese character 帥 means generalissimo ⓒ강화역사박물관

오랜 기다림 끝에 귀환한 수자기

미군은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광성보 진영에 걸었던 수자기를 포함한 여러 벌의 깃발과 대포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전리품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수자기는 이후 애나폴리스에 위치한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왔다. 2007년 초 문화재청은 수자기 반환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3월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앞으로 의견을 타진하였지만 원칙적으로 반환은 불가하다는 답변을 얻었다. 하지만 연구 목적의 조사는 괜찮다고 하여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6월,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10년간의 장기대여를 결정하면서 수자기는 2007년 10월 19일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수자기는 2008년 4월 고궁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된 후 인천시립박물관을 거쳐 2010년 10월 강화역사박물관이 개관하면서 139년 만에 원래 수자기가 있었던 고향인 강화로 돌아왔다. 강화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유물은 박물관이 여섯 자리 고유 식별 번호를 부여한다. 하지만 수자기는 강화역사박물관이 개관했을 때부터 보관 관리해 온 유물임에도 여섯 자리 고유 소장번호가 없다. 이는 수자기가 대여 유물로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자기는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에 돌아 온 이후에도 2년마다 대여 연장을 해야 했고 최장 10년이라던 종전의 계약기간 만료 즈음에는 재계약 문제로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현재는 강화역사박물관과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재계약을 체결하여 2022년 10월까지 수자기가 한국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여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온 많은 환수문화재가 지닌 문제로 다양한 부분에서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신미양요 150주년을 맞은 올해, 신미양요가 일어난 6월에 맞추어 강화역사박물관에서는 수자기를 한 달간 특별 전시한다. 150년 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고 치열하게 싸운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수자기를 실제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글. 신미란(강화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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