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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神)이 된 관우(關羽)와 < 국사당의 무신도 >
작성일
2020-08-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029

신(神)이 된 관우(關羽)와 <국사당의 무신도> 무신(武神) 관우. 그의 자는 운장이나 그 이름 앞에 무신을 붙여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삼국지연의』에서 무력 최고치를 100으로 놓는다면 그 자리엔 당연히 여포가 들어설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무신으로 불리는 건 관우다. 왜 그럴까? 관우의 신격화는 어떻게 이뤄졌고 그 영향이 관우의 그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강영주 감정위원의 ‘문화재 함께 읽기’ 를 통해 살펴보자. 01.국가민속문화재 제17호 <국사당의 무신도> 20세기 초반, 견본채색, 101.0x57.0㎝ ⓒ문화재청 02. 채용신 <관제도> 1928년, 견본채색, 108.0x71.2cm ⓒ전북대박물관 03. <관우도> 지본채색, 민속박물관 (소장번호: 민속30578) ⓒ국립민속박물관

관우의 신격화

촉한의 무장이었던 관우가 전쟁의 신, 재물의 신, 무(武)의 신으로 추앙받은 것은 명청대에 소설화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유행하면서부터이다.


무장인 그가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장군이 되고, 수·당대에는 무성왕묘(武成王廟) 종사를 통해 국가의 사전(祀典)에 편입되었으며, 송·원대에는 후(侯)에서 공(公)으로 그리고 왕(王)으로 추존되고 명·청대에는 관우 신격화가 절정에 달해 황제(皇帝)에 등 극하고 신령(神靈)으로 숭배된다. 특히 종교적으로도 불교에서는 사찰의 수호신, 도교에서는 만능수호신, 유교는 충의(忠義)의 무신으로, 국가통치질서 확립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조선에서 관우를 섬기며 제사를 지내는 관왕묘의 건립은 정유재란 때 이루어졌다. 1598년 당시 명군(明軍)이 남묘를 지었고, 이듬해 동묘가 세워졌다. 그리고 고종대에 이르러서는 북묘와 서묘가 건립되는 등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생겼다. 이때 관우신앙의 정치적 활용도 주목할 만하다. 선조,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은 관우의 ‘충의용절신(忠義勇節信)’을 퍼뜨려 자연스럽게 왕에 대한 충성을 중요한 미덕으로 내세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한 권력 강화를 기대했다.


고종대 관우신앙의 정치적 성격

조선에서는 특히 고종 대에 관우신앙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달했다. 임오군란 중 충주로 피신했던 명성황후의 환궁 시기를 ‘관성제군의 딸’이라 자처한 진령군이 맞힌 후 왕가의 자손번창과 복운을 위해 1883년 북묘가 건립됐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그북묘로 피신할 만큼 관우신령에 의지하기도 했다.


이후 1902년 세워진 서묘는 엄비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건립되었고, 관왕을 관제로 격상시켰다. 한편 국가주도로 『관성제군명성경』 같은 관우 관련 서적을 간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관성교 같은 종교단체의 경전으로 쓰이는 등 황제권 강화와 상무정신 보급을 위한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활용됐다. 고종은 대내적으로 충의로운 신하의 상징인 관우신앙을 이용하여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려 했으며,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무신이며 수호신인 관우를 이용해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후 1908년 향사이정(享祀釐正)의 발표로 관왕묘 제사가 종료되며 관우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숭배보다 재액초복 등 기복적인 성격이 강화된 민간 신앙으로 확산된다.


무속의 신이 된 관우와 그 도상

조선 후기부터 무속에서 관우가 신령으로 모셔졌지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기에는 국가 주도의 제의와 맞물려 관우신앙이 고조되었다. 이에 관왕묘에는 건물의 장식과 장엄을 위한 조각상이나 『삼국지연의』의 대표적 내용을 담은 벽화 등이 묘사 되었고 숭배 대상이자 주신(主神)인 관우의 화상을 봉안하는 사례도 생겼다.


특히 서울을 비롯해 지방의 관묘나 민간 사당에 무속의 신으로 모셔지며 수많은 관우도가 제작되었는데, 1904년 경무사가 서울에서 3,000점이나 되는 관왕도상을 수합하여 태웠다는 기록과 일본인 재정고문이 각 지방과 공공장소에 관우묘가 설치되었다고 기록한 것에서 관우신앙이 민간에 상당이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주관의 숭배 대상이며 무속에서 가장 영험한 신령이었던 관우는 어떤 모습으로 제작되었을까?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관우도상의 특징은 큰 키와 대춧빛 얼굴, 길게 찢어진 봉황의 눈, 누에 같은 눈썹, 연지를 바른 것처럼 붉은 입술, 세 갈래의 긴 수염이 특징이다.


지물로는 청룡언월도나 공자의 『춘추』를 들고 있고도3, 가운데의 긴 수염이나 옥대를 잡고 있는 도상이 많다. 복식은 두건을 쓰거나 투구에 갑옷을 입고 전포를 걸친 장군의 모습도1, 익선관을 쓰고 황룡이 그려진 흉배가 있는 붉은 곤룡포를 입고 옥대를 한 왕의 모습, 면류관을 쓰고 황색 곤룡포를 입고, 양손으로 홀을 쥐고 옥대를 두른 황제의 모습 등으로 그려진다.


인왕산 국사당의 <관우도>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1925년 일본인이 인왕산으로 옮겼다. 신사(神社)가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게 일본인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이때 태조[이성계], 무학대사, 최영 장군, 민중전[민비], 창부씨, 삼불제석, 별상[사도세자], 용왕 등 신상들이 새로 봉안되었다.


현존하는 무신도 중 가장 뛰어난 필력을 보여 주는 < 국사당의 무신도 >는 당주의 구술로 신상의 명칭이 구전되어, 명확한 도상과 성격 등이 모호한 상태이다. 그중 군웅, 금성, 별상 심지어 최영 장군으로 불리는, 투구와 갑옷을 걸친 장군상은 관우도일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언급한 관우도상의 가장 큰 특징인 대춧빛 얼굴색, 치켜뜬 눈, 붉은 입술, 세 갈래의 긴 수염, 칼을 지물로 들고 있는 것,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모습 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우를 회유하려던 조조가 내린 새 비단 전포 위에 유비가 준 낡은 녹색 전포를 입어 그 의리(義理)를 나타낸 도상은 관우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다.01, 02, 03 특히 좌상일 때 다리 사이로 보이는 갑옷의 일부분은 관우의 유비에 대한 충과 의리를 반영한 것으로, 원대 소설의 삽화에서부터 즐겨 사용되는 상징기호 같은 것이다.


이렇듯 그의 신상은 전쟁에서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는 ‘전쟁의 신’인 장군상으로 제작되기도 하고, 유가의 충절과 의리를 실현한 도덕적이고 청렴한 관리의 모습으로도 그려지며, 불가에서는 가람신이자 관제보살(關帝菩薩)로, 상인들에게는 재복신으로 제작되고 숭배되었다.


특히 그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억울한 죽음을 당해 무속 신령이 되었으며, 지배계층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의 억울한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최고의 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각 신당에 봉안된 여러 토속신 사이에서도, 중국에서 건너온 관우가 신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 이 글은 ‘장장식, 「삼국지연의도와 관우신앙」’, ‘『삼국지연의도』, 국립민속박물관’, ‘2016; 장준구, 「中國의 關羽圖像」’, ‘『미술자료』 76, 국립중앙박물관’, ‘2007; 종로구청, 『동관왕묘-소장유물 기초학술 조사보고서』, 2012’ 같은 관우에 대한 선행연구를 참고하였다. ** 이 글은 필자가 「최영 장군 신앙과 무신도 유형 고찰」(강영주), 「2019 한국민화학회 학술대회 ‘민화와 생(生)’」 pp.43-61(한국민화학회, 국립중앙박물관, 2019. 8. 31.)에서 발표하고, 그중 관우도 관련 내용을 보완·재집필한 것이며, 추후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 관우도상의 표상과 < 관우도(關羽圖) > 연구」로 별도 지면에 발표할 예정이다.



글, 사진자료. 강영주(제주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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