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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왕권의 존재와 왕실 혼백의 상징
작성일
2019-02-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014

주렴(朱簾) 우리나라에서 발은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는 데 긴요하다. 또한 발은 안에서는 바깥을 내다보지만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차면(遮面)의 기능도 지니고 있다. 백성들의 발과 달리 조선 왕실에서의 발은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 수렴청정(垂簾聽政) 당시 대왕대비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발을 내려뜨리고 정치하였던 것이 대표적이다. 발 중에서 대올에 붉은 칠을 해서 짠 주렴(朱簾)은 왕실을 상징하여, 잔치가 베풀어지는 궁궐의 창호나 왕이 탄 가마 등에 걸어 왕실 어른과 신하들의 신분과 계층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주렴은 왕의 신주를 모신 종묘나 왕의 주검을 모신 왕릉, 그리고 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 등 다양한 공간에서 왕실의 상징적 가치를 강화한다. 01. 창덕궁 선정전(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던 편전의 하나) ⓒ문화재청 02. 신실의 감실과 감실 사이는 벽으로 막혀있지 않은 대신 주렴을 설치하여 칸을 막았기 때문에 이 주렴은 격렴(隔簾)이라고 부른다. ⓒ국립고궁박물관

여름철 무더위를 식혀주던 발

우리의 여름은 매우 무덥다. 선풍기나 에어컨도 없던 시절, 부채만으로 더위를 쫓기는 어려웠다. 한옥의 대청마루는 앞뒤가 탁 트여 여름나기에 적당하다. 그러나 체면을 중시한 조선의 선비나 남녀를 가린 양반집 여인들은 자신의 행동거지를 남들이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안에서는 밖이 내다보이고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으면서, 시원한 바람이 잘 통해 더위를 식혀줄 장치가 필요했다. 궁중 또한 왕실 여인이 있어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대나무를 가늘고 잘게 쪼개 발틀에 올려 고드랫돌을 앞뒤로 옮겨 네모지게 짠 발[簾]이 있어 선조들의 여름나기를 쉽게 했다. 또 대청마루에 걸어 얼굴을 가려주어[遮面] 체면을 차릴 수도 있었다.

주렴 주렴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후 붉은색 칠을 한 발이다. 조선시대의 각종 국가·왕실 의례에서 사용되는 각종 가마의 사면이나 전면에 주렴을 드리우고, 종묘와 영녕전 등 각종 사당이나 능원의 신문 밖에도 주렴을 드리운다.

궁궐에 걸린 붉은 발, 주렴

발은 백성뿐 아니라 궁궐에서도 긴요하다. 다만 궁궐전각은 백성의 가옥보다 커, 발의 길이가 길고 굵기가 굵으며, 무엇보다 붉은 칠을 하고 푸른 실로 짜 장식한 점이 다르다. 이렇게 붉은 칠을 한 발을 주렴(朱簾)이라 부른다.

주렴은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한눈에 보여준다. 조선왕실의 잔치를 그린 기록화, <진찬도병>을 보면 궁궐의 전각 중 가장 위계가 높은 전각 그리고 왕실 여인들이 위한 잔치[內宴]에만 붉은 주렴이 걸려 있다. 주렴에 의해 이곳이 바로 잔치의 주인공이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보며 잔치를 즐길 수 있으나, 밖에 있는 신하들은 왕실 어른들이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게 가려주는 기능을 주렴이 하는 것이다.

결국 주렴을 궁궐에 걸어 왕실의 내부공간을 외부와 차별화시키고, 왕실과 그 밖의 연희 참석자의 신분에 따른 계층을 차등화한다. 주렴은 왕실 잔치에서 심리적 물리적 위계를 분리하는 중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왕실 여인들은 주렴 안쪽에 앉아 연희 공간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궁중무용을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은은하게 감상하였던 것이다.

03, 04. 국가무형문화재 제114호 염장 기능보유자 조대용의 작품. 염장(簾匠)이란 발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05. 조선 왕실의 잔치를 그린 기록화, <진찬도병>을 보면 궁궐의 전각 중 가장 위계가 높은 전각 그리고 왕실여인들을 위한 잔치에만 붉은 주렴이 걸려 있다. ⓒ문화콘텐츠닷컴

수렴청정, 왕실 여인의 왕권상징

조선 왕실에서 발이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순간이 바로 수렴청정이다. 수렴청정은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할 경우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나 대비가 발을 치고 왕과 함께 정치를 담당하는 제도이다. 조선에서 수렴청정은 여러 차례 있었다. 『증보문헌비고』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대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52세)가 수렴청정의 효시이고, 명종대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45세), 선조대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36세)가 있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기에 순조대(11세) 영조비 정순왕후 김씨(56세), 헌종대(8세)와 철종대(19세) 순조비 순원왕후 김 씨(46세, 61세), 고종대(12세) 익종비 신정왕후 조씨(56세) 등 7차례 6명이 수렴청정을 했다.

아무리 왕실의 어른이라도 유교적 내외법이 엄연한 조선 사회에서 남성 신하와 왕실의 여성 어른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망극한 일이다. 이를 해소하고자 조선 전기부터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세도정치기인 순조 때에 ‘수렴청정절목’을 제정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는 궁궐은 편전으로 정하고, 대비는 발을 안쪽에 치고 동쪽에 가까운 남쪽을 향해 앉으며, 왕은 발 바깥쪽 서쪽에 가깝게 남쪽을 향해 앉도록 하였다. 대비는 발을 내리고 직접 신하들과 정무를 처리하였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유교적 관념이 왕실에 적용되어, 대비의 얼굴을 신하들이 바로 보지 못하도록 궁궐 전각 외부에 발을 내려뜨린 것이다. 이렇게 위치와 자리를 통해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의 위상을 왕과 같게 하였는데, 그녀들의 존재는 ‘발’이라는 물질로 시각화, 상징화된 것이다.

주렴은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한 눈에 보여준다.

종묘와 왕릉, 진전의 주렴

주렴이 조선 왕실에서 갖는 상징성은 그것이 설치된 공간에서 확인된다. 종묘, 왕릉, 경기전 및 신선원전 등 선대 왕이나 왕후의 혼백 및 초상을 모신 공간에 주렴이 설치되어 있다.

종묘는 조선을 다스린 선대 왕과 왕후의 혼이 담긴 신주를 모신 신성한 왕실 사당이다. 정전과 영녕전은 19실과 16실의 신실이 있어 좌우로 긴 장중한 건물이다. 신실로 들어가는 신문(神門)에는 삿된 것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렴이 걸려 있는 밖에 있다고 하여 외주렴(外朱簾)이라고도 부르고,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에도 그려져 있다. 신실 안 감실에 배치된 신주장 안에는 선왕과 선왕후의 신주를 놓고 그 앞을 주렴으로 가렸다. 가장 안쪽에 있다 하여 내주렴(內朱簾)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신실의 감실과 감실 사이는 벽으로 막혀있지 않다. 대신 주렴을 설치하여 칸을 막았기 때문에 이 주렴은 격렴(隔簾)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감실내 신주장이나 감실 및 신문에는 주렴을 설치함으로 써 외부에서는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그 안에 있는 선왕이나 선왕후의 영혼은 내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러한 종묘의 내주렴과 격렴의 경우 현재 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에서도 확인된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나 조선 왕실의 마지막 진전이었던 신선원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렴이 사용되었다. 왕의 초상을 모신 감실 앞이나 감실과 감실 사이의 칸을 격렴으로 막은 것이다.

왕릉은 조선의 선왕과 선왕후의 주검, 체백을 영원히 모신 사후 보처이다. 왕릉의 앞에는 정자각을 세워 그들에게 제향을 올리는데, 정자각 내부 북쪽에는 신어평상(神御平床)을 놓고 문[神門]을 낸다. 왕릉을 조성한 『의궤』에 의하면 이곳 신문에는 주렴을 걸어 이것을 신문주렴, 줄여서 신렴(神簾)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신렴은 종묘 신주 앞에 건 내주렴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렴을 통해 왕릉 봉분에 있던 체백이 제향을 드리던 후손을 만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왕릉 정자각의 북쪽 신문에 신렴이 갖춰지지 않아 조선 왕의 체백을 우리가 본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조선시대 원형대로 신문에 신렴을 갖춰 원형대로 복원하고 신격화된 조선 선왕과 선왕후의 혼백을 기려 왕실의 존엄함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06, 07. 2개월간 햇볕과 이슬 맞히기를 반복한 시누대로 발을 엮는데 보통 만 번 이상의 손이 가야 할 만큼 발 제작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문화재청

글. 장경희 (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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