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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 일제시대 문화재 수난사를 되새기다
작성일
2005-07-2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6885

잊지 못할 민족 자존심의 상처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파괴와 약탈

일제강점기, 불행은 문화재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일제에 강탈 당한 우리 문화재는 3만여 점 이상. 그 상당수가 아직도 일본 땅에 남아 있다. 그건 우리에게 분명 치욕이다. 선인들의 문화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올해, 일본 속의 한국 문화재가 자꾸만 생각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18년 도쿄의 오쿠라저택에 옮겨 세워진 경복궁 자선당 모습
(김정동 목원대교수 소장사진)
<1918년 도쿄의 오쿠라저택에 옮겨 세워진 경복궁 자선당 모습
(김정동 목원대교수 소장사진)>
최근 들어 일본에 있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반환 여부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05년 일제가 강탈해갔으니 무려 100년 만의 일이다. 반환의 성사 여부를 아직 예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한 세기가 다 되어서야 반환이 제대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불행은 문화재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일제에 강탈당한 우리 문화재는 3만여 점 이상. 그 상당수가 아직도 일본 땅에 남아 있다.

조선의 자존심, 도성과 궁궐의 파괴

일제의 문화재 파괴 및 약탈은 국권침탈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우선 당시 조선의 상징적인 문화재를 훼손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망가뜨리려는 의도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숭례문(崇禮門, 국보 1호) 담장 파괴를 들 수 있다. 일제는 1907년 서울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숭례문 주변 성곽을 헐어버리고 도로를 냈다. 무례함과 몰지각함의 극치였다. 이어 1915년엔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을 헐어버렸다.
   일제의 문화재 파괴는 경복궁 등 궁궐로 이어졌다. 특히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일제는 경복궁 내 전각 4000여 칸을 무단으로 해체 반출하여 일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자선당(資善堂) 건물을 통째로 뜯어 일본으로 무단 반출한 것도 그 때였다.
   일제는 이어 흥례문(興禮門)을 헐고 1925년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으며, 1927년엔 총독부 건물의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建春文) 옆으로 옮기기도 했다.

일제의 무분별한 문화재 약탈과 파괴

문화재 약탈도 적지 않았다. 요즘 관심 대상이 된 북관대첩비가 약탈당한 것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은 함북 길주에 있던 북관대첩비를 도쿄로 강탈해갔다. 이 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1565∼1624)가 왜군을 물리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은 야스쿠니(靖國)신사의 외진 곳에 방치되어 있다.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86호 높이 13.5m)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86호 높이 13.5m)>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경복궁 내 전각을 철거하고 다른 건물을 세워
경복궁을 훼손한 모습(이순우씨 소장사진)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경복궁 내 전각을 철거하고 다른 건물을 세워
경복궁을 훼손한 모습(이순우씨 소장사진)>

   경천사 10층 석탑(고려 1348년 제작, 국보 86호)에도 불행한 역사가 담겨 있다.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일본 정부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는 무력을 동원해 1907∼1909년 경 경기 개풍군(현재 북한의 개성시) 부소산에 있던 경천사 10층 석탑을 마구 해체해 도쿄로 빼돌렸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내에서 이 탑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반환 여론에 밀린 다나카는 결국 1918년 이 탑을 한국에 반환했다. 하지만 탑은 적잖이 훼손된 뒤였다.
   또한 이 무렵 일본인들은 불국사 다보탑 기단부의 네 귀퉁이에 있던 4개의 돌사자 중 3개를 몰래 떼어내 달아나기도 했다.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124호)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이 보살상은 강원도 강릉 한송사 터에 있었다. 그런데 1912년 일본인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 이 보살상이 돌아온 것은 1966년. 한일협정에 따른 약탈 문화재 반환 협약에 의해서였다.
   일본인들의 고분 도굴도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 파괴 사례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완용을 등에 업고 사람을 시켜 개성 일대의 고려 고분을 도굴해 수많은 고려청자를 빼돌렸다. 이와 함께 경주·부여·공주·평양 등 전국 곳곳에서 불법도굴이 횡행했다. 많은 백제 고분을 도굴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도 그같은 도굴꾼의 한 명으로, 그는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을 마구 파헤쳤다. 그 송산리 6호분 바로 옆엔 무령왕릉이 있었다. 무령왕릉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는 당연히 도굴했을 것이다. 무령왕릉이 가루베의 손을 피해간 것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면 일제의 문화재 파괴는 극에 달한다. 무조건 파괴였다. 1943년 ‘유림의 숙정 및 반(反)시국적 고비(古碑)의 철거’란 비밀명령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일제는 이 명령을 명분 삼아 한국의 민족의식이 담긴 비석들을 모조리 파괴하거나 매장해버렸다. 전남 해남의 이순신 명량대첩비, 충남 아산의 이순신 신도비(神道碑), 전북 남원의 이성계 황산대첩비, 경기 고양의 행주전승비 등 20여 점의 석비가 그렇게 사라져갔다.
   보수 복원이란 명목으로 문화재를 훼손한 경우도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훼손된 상태의 석굴암을 보수 복원하면서 돔 지붕 위에 시멘트를 발랐다. 이로 인해 습기가 차는 등 내부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전실 좌우벽의 팔부중상(八部衆像, 좌우로 각각 4구씩)을 하나씩 꺾어 직각으로 배치함으로써 올바른 복원인지를 놓고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보존 및 반환 노력 기울여야

물론 일제시대 때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적지 않았다.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수정 박병래(水晶 朴秉來) 선생 등은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함으로써 일제에 의한 무단반출을 막았다. 일제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강탈해가자 당시 언론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폭로해 1918년 결국 ‘환수 항복’을 받아낸 영국인 베델과 미국인 헐버트의 헌신적인 노력도 기억해야 한다.
   일제가 무참하게 약탈해간 문화재 가운데 일부는 1966년 5월 우리 땅에 돌아왔다. 약탈 문화재 반환은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맺은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반출해 간 고분 출토품과 일본인이 개인적으로 약탈해 간 문화재 등 모두 4479점의 문화재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개인 소유 문화재를 제외한 채 국유 공유 문화재 1432점만 반환하고 끝내버렸다. 그 때 반환된 것은 약탈 문화재 가운데 지극히 일부였다. 이것은 당시 한국 정부의 안일한 대응 탓이었다. 문화재 반환 협약에 ‘개인 소유 문화재는 자발적인 기증을 권고한다’고만 해놓았던 것이다.
   그건 우리에게 분명 치욕이었다. 선인들의 문화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올해, 일본 속의 한국 문화재가 자꾸만 생각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광표 /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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