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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분의 한계를 딛고 출세 가도를 달린 노비들
작성일
2016-11-04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200

신분의 한계를 딛고 출세 가도를 달린 노비들 주어진 삶에 좌절하기보다 조금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 희망은 그들을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노비라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나간 시대의 인물들을 만나본다. 김홍도 『기와이기』 ©국립중앙박물관

우리가 아는 노비와 실제의 노비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노비의 모습은 사극 드라마 <추노>에서 본 것처럼 고된 노동에 지쳐 결국 도망을 시도하는 기구한 운명의 군상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노비는 소수에 불과했다. 주인집에 사는 솔거 노비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집에 거주하면서 주인집 농토를 경작했다. 이런 노비를 외거노비라고 불렀다. 지주 입장에서는 양인에게 땅을 빌려주기보다는 자신의 노비에게 빌려주는 편이 통제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많은 노비는 소작농의 삶을 살았다.

소작농 외에도 노비의 직업은 다양했다. 상업에 종사하거나 관청에 근무하는 노비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건 간에 법적으로 주인한테 얽매여 의무를 이행하면 노비라고 지칭한 것. 그중에는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출세를 꿈꾸는 노비도 존재했다. 사극에서도 그러한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야심을 품은 노비는 대부분 처지를 개선할 목적으로 도망이라는 방법을 선택한다. 주인집을 뛰쳐나가 노비 신분을 숨기고 새롭게 정착하는 것이 드라마 속 노비들의 현실 타개책이다. 노비 김의동이 그러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노비가 그보다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신분을 숨기고 사는 것은 어느 시대건 간에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시대가 허용하는 선에서 출세와 성공을 이루어냈다. 노비 박인수와 김의동, 반석평이 그러했다.

 

양반의 스승이 된 노비, 박인수

박인수는 광해군 시대의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등장한다. 그는 정2품 벼슬을 지낸 신발이란 사람의 노비였다. 『어우야담』을 보면 대다수 노비는 소작농을 하거나 공업·상업에 종사했으며 혹은 군대에서 복무했다. 하지만 박인수는 일반적인 노비들과 달리 어려서부터 학자의 길을 걸었다. 대학자 서경덕의 제자인 박지화의 도움으로 학문을 접한 뒤, 박인수는 이탈하지 않고 꾸준히 실력을 쌓아 나갔다. 끊임없이 학문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재능이 뛰어났던 것도 있지만,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인수는 높은 학구열만큼이나 선행에도 앞장섰다. 덕분에 그는 학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됐고, 이를 기반으로 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학생들의 대다수는 양반 계층 선비들이었다. 노비 스승 밑에 양반 제자들이 있었던 셈인데, 이는 그가 뛰어난 학문 실력으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했음을 뜻한다. 노비 이미지를 불식시킬 정도의 탄탄한 실력을 갖췄기에 선비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다. 유교 성리학 외에 불교에도 조예가 깊고 이따금 거문고 연주까지 했으니, 남들 눈에는 전혀 노비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아침 박인수의 집에서는 그의 출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일어났다. 수십 명의 제자가 새벽에 문안 인사를 한 뒤, 박인수에게 아침 식사로 죽을 올리는 것이었다. 박인수가 식사를 끝낸 다음에야 제자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노비 출신 학자가 이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존경을 받았기에, 대학자 유몽인이 자신의 책에 박인수 이야기를 실었던 것이다.

 

신분세탁으로 시장급이 된 노비, 김의동

김의동 역시 『어우야담』에 등장한다. 조선 전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 사람 신 씨의 솔거노비였던 그는 업산이란 동료와 함께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을 했다. 일이 너무 힘든 나머지 결국 그가 내린 선택은 운명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었다. 주인집에서 도주해 신분을 숨기고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김의동은 주인집에서 상당한 돈을 모았던 모양이다. 숨어 사는데 그치지 않고 신분세탁을 통해 양인 신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공직에까지 진출했다. 처음에는 나루터 직원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현감(縣監)을 거쳐 부사(府使)의 자리까지 올랐다. 부사는 지금으로 치면 1급 지방자치단체 시장이었다. 주인집에서 나와 부사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0년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가도 못할 일을 도망친 지 10년 만에 해냈다. 이 과정에서 불법과 부정도 없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신분을 뛰어넘기 위해 공부는 물론 대인관계에도 크게 신경 써, 직무상의 실적도 많이 거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급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 사이의 새재(조령)를 넘을 때였다. 그 길에서 우연히 노비 시절의 동료였던 업산을 만났다. 업산은 주인 심부름으로 경상도에 가던 길이었다. 그 순간, 김의동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수습에 나섰다. 업산을 후하게 대접한 다음 재물을 쥐여준 것이다. 그는 업산에게 고급 비단 50필을 주면서 “40필은 주인어른께 드리고 10필은 당신이 가져라”고 말했다. 1560년경 경북 영덕군에서 논 1마지기가 면포 3필에 거래됐고, 비단은 면포보다 고가였으니 비단 50필이 얼마나 비쌌을지 짐작할 수 있다. 고급 비단 덕분에, 주인도 업산도 입을 다문 덕분에, 노비 김의동이 어떤 이름으로 공직생활을 했는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김의동이란 노비가 대단한 출세를 이뤘다는 얘기만 알려졌을 뿐이다.

 

장관급이 된 노비, 반석평

반석평은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과 더불어 『어우야담』에도 거론 된다. 그는 가난한 노비의 아들이었다. 원래 성은 반씨가 아니었다. 반씨는 양아버지의 성이었다. 그의 주인이 학업 능력이 뛰어난 그를 출세시킬 목적으로, 아들 없는 부자인 반서린의 양자로 들여 보냈기 때문에 반씨 성을 갖게 된 것이다.

돈 많은 양부모의 지원을 받게 된 반석평은 더욱더 공부에 매진했다. 재능과 재력이 결합했으니 어깨에 날개를 단 듯했을 것이다. 그는 연산군 시절인 1504년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해 생원이 된데 이어, 중종 때인 1507년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했다. 그 뒤 함경도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 평안도 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노비로 태어난 사람이 장관급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성공신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친족 중에 양자를 들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혈연 관계없는 노비를 양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반석평의 입양은 공개적으로 드러낼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노비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말을 타고 가다가도 원래의 주인집 가족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진흙땅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나중에는 조정에 자기 신분을 고백했다가 탄핵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와 솔직함, 무엇보다도 뛰어난 행정 실력을 인정받아 위기를 면하고 관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글‧김종성(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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