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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 속,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작성일
2016-07-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024

역사 속,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시대 장애인 복지정책은 요즘과 비교해도 대단히 선진적이었다. 당시에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자립하도록 했다. 특히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의 경우, 대표적인 자립 가능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점을 치는 점복이나 경을 읽는 독경, 악기 연주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스스로 먹고 살도록 했다. 심지어 조선 정부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명과학(시각장애인 점복가를 위한 관상감 소속의 관직)이나 관현맹인(시각장애인 악사를 위한 장악원 소속의 관직) 같은 별도의 관직을 두어 정기적으로 녹봉과 지위를 올려주며 자립하도록 독려했다. 여기에서는 그중 관현맹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시각장애인의 생활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원기로회도> 필자 미상, 1730년 ©국립중앙박물관 1730년 이원(장악원)에서 열린 장악원 전・현직 관원의 계회(고려와 조선시대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조직된 모임)도이다. 앞줄에 악공들이 앉아 기녀들의 춤과 노래에 반주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관현맹인도 궁중의 내연에서 이와 같은 모습으로 음악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각장애인 악사를 위한 관현맹인 제도

관현맹인(管絃盲人)이란 시각장애인 가운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궁중음악 기관인 장악원에서 퉁소, 피리, 가야금, 거문고 등 관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하도록 하는 이들을 말한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장악원에는 900여 명의 악공, 악생과 20여 명의 관현맹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관현맹인은 양인뿐 아니라 천인 중에서도 선발되었는데, 장악원에서 일 년에 네 차례씩 이조(吏曹)에 추천서를 올려 사령서(임명, 해임 따위의 인사에 관한 명령을 적어 본인에게 주는 문서)를 받아 임명했다.

이러한 관현맹인 제도를 설치한 이유는 내외법이 엄격한 시대 상황에서 남자 악공들이 왕대비나 왕비, 후궁 등의 내연(內宴)에 들어가 기녀들의 춤이나 노래에 반주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앞이 보이지 않는 관현맹인을 동원했던 것이다. 또 시각장애인에게 직업과 관직을 주어 자립하도록 하려는 복지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이는 고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삼대(三代: 하·은·주) 시대엔 맹인을 시켜 시를 외고 북을 두드리게 하였으니(시를 외워 바른 일을 말하고 북을 두드려 일식과 월식을 막았다고 한다), 이는 『주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또 악(樂)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본보기로 맹인을 장악원에 예속시켜 두고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 때면 맹인에게 눈 화장을 하고 악기를 들고 들어가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언제부터 장악원에 소속되어 악기를 연주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최소한 세종 6년 이전에는 설치된 듯하다. 『세종실록』 6년(1424) 7월 22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맹인 26명이 아뢰기를 “우리들이 각기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을 직업 삼아 스스로 생계를 이어왔는데, 근래 국상(國喪)으로 인해 음악을 정지했으니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각각 쌀 한 섬씩을 주라고 명하였다.

『기축년진찬도병』 中 <자경전내진찬> 필자 미상, 1829년© 국립중앙박물관

또 성종 때에 편찬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들 관현맹인은 장악원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정확한 숫자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20명의 관현맹인 중에서 4명을 뽑아 종9품의 체아직(현직을 떠난 문무관에게 계속하여서 녹봉을 주려고 만든 벼슬)을 주고, 출근 일수가 400일이 되면 품계를 올려주되 천인의 경우엔 종6품 이상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후 관현맹인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잠시 폐지되었다가 효종 때에 부활되었고, 조선 말기인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나라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이들의 생활도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악장등록』 숙종 6년(1680) 11월 24일조를 보면, 관현맹인 홍석해 등이 자신들의 녹봉을 복구해달라고 임금께 상소를 올리고 있다.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대에 쓰임이 있다면, 또한 그들을 돌봐주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궁중기록화에 나타난 관현맹인의 모습

이들 관현맹인의 임무는 앞에서처럼 궁중 잔치 가운데 왕대비나 왕비, 후궁, 공주 등을 위한 내연에서 기녀들의 춤과 노래의 반주를 맡는 것이었다. 그들이 내연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궁중기록화인 『기축년진찬도병』 중 <자경전내진찬>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데, 관현맹인과 장악원 악공들이 대문간에서 가림막 뒤에 혹은 그냥 앉아 기녀들의 춤을 위한 반주 음악을 넣어주고 있다.

이들은 조선후기까지 주로 내연에서 연주했다. 예컨대 영조 20년(1744) 『진연의궤』를 보면, 김진성과 신찬휘, 전득주, 윤덕상, 백봉익 등의 피리잽이, 이덕균과 최덕항 등의 젓대잽이, 최영찬과 박지형 등의 해금잽이, 이필강 등 거문고잽이, 주세근과 함세중 등의 비파잽이, 강상문 등과 같은 초적잽이 등 13명의 관현맹인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세종대의 난계 박연(朴堧: 1378~1458)은 이들 관현맹인의 처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 13년(1431) 12월 박연은 임금 앞에서 관현맹인의 어려움을 호소한 뒤, 그들에게 더 높은 벼슬을 내리고 일반 관원들처럼 사철마다 녹봉을 주자고 요청한다. 또 그는 이 자리에서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강조했는데, 해당 부분만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개 관현의 음악을 익히는 일은 고생을 면치 못하는 반면 점복의 일은 처자를 봉양할 만하므로, 총명하고 나이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음양학으로 가고 음률을 일삼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약 격려하는 법이 없다면, 맹인 음악은 끊어지고 장차 힘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옛날 제왕은 모두 장님으로 악사를 삼아서 현송(絃誦: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음)의 임무를 맡겼으니,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대에 쓰임이 있다면, 또한 그들을 돌봐주는 은전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그러자 세종은 이듬해 1월에 박연이 제시한 사항들을 모두 그대로 따르도록 지시한다. 이와 같이 조선 정부는 별도로 관현맹인 제도를 두어 시각장애인의 자립을 유도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는 시각장애인 음악가가 매우 많았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상당수 출현했다.

조선전기 관현맹인 출신의 시각장애인 음악가만 해도 세종 때의 이반, 성종 때의 정범, 김복산, 이마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반은 현금을 잘 타서 궁중에 출입했고, 정범과 김복산은 가야금으로 유명했다. 특히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나서 성종에게 포상으로 벼슬을 받기도 했다. 이마지도 빼어난 가야금 솜씨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두 번씩이나 장악원 전악(음악감독)이 되었다. 관현맹인 뿐 아니라 장악원 전체의 음악감독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관현맹인 제도는 비록 근대에 이르러 폐지되었지만, 시각장애인 단체의 음악적 전통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단적으로 2005년 ‘한빛예술단’이 창단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2011년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복원하여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단체의 음악적 전통이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져 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글‧정창권(고려대 교양교직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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