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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유적 세계유산 등재가 지닌 의미
작성일
2016-03-03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804

백제 유적 세계유산 등재가 지닌 의미 영토의 변화가 적지 않았던 백제의 영역을 지금의 행정 구역을 이용해 통시대적으로 극대화해 보자. 그렇다면 황해도남 부와 경기도,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그리고 서부 경상남·북도 일대가 된다. 한반도 전체 영역의 3분의 1 쯤이 백제의 최대 판도였던 것이다. 이러한판 도 안에서 백제는 대략 700년 정도의 삶을 영위하였고, 또 흔적을 남겨놓았다. 천행으로 보존된 백제 유적 가운데 국가의 심장부격인 도성이 소재했던 공주와 부여 그리고 익산 지역의 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영예를 입게 되었다. 공주의 공산성과 무녕왕릉,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 왕릉군 익, 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인 것이다. 작년 7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 유적의 가치 평가와 홍보는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중언되는 당위론적인 서술은 지양하고자 한다. 오히려 이를 통해 백제 유적과 백제 문화, 나아가 백제사 전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재평가될 수 있는 일 대 전기를 맞았다고 본다. 그간 소홀히 인식했거나 편견과 왜곡으로 헝클어졌던 백제사 인식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백제사에 대한 근원적인 왜곡은 건국자 문제에서부터 초래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를 2명이나 수록하였다. 맨 앞에는 고구려 시조의 아들이라는 온조가 보인다. 두 번째로 적힌 우태(優台)의 아들 비류왕은 족계(族系)를 북부여에 두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어느 기록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외형상 두 기록을 모두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아주 쉽게 결론이 난다.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인 안정복(安鼎福)은 “지금 보건대 백제가 고구려의 고씨(高氏) 성을 따르지 않고 부여씨(扶餘氏)라 하였으며, 또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올린 표(表)를 고찰하건대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고 한 말이 증거가 되므로, 우태의 후손이 분명하다”고 설파했다. 그는 요령 있게 핵심을 짚어 백제 시조는 고구려계가 아니라 부여계임을 논증한 것이다. 이는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거나 ‘부여별종(別種)’으로 인식된 데서도 뒷받침된다. 그 밖에 문헌 분석과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서도 백제 건국 세력의 기원은 부여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에 대한 또 다른 왜곡과 편견으로는 시종 고구려를 추월하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472년에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보면 369년 이래로 고구려가 선제 공격을 해 왔지만 번번이 패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는 근초고왕대의 『삼국사기』 기록과 부합하고 있다. 급기야 371년에 백제군은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의 수급을 베었다고 자랑했다. 고구려를 압도했던 백제의 군사력은 436년경에 북위에 쫓긴 북연의 잔당들이 고구려 영내로 들어옴에 따라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선비족인 북연의 강대한 군사력과 군사기술이 고구려에 이입된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는 액면 그대로 모두 취할 수는 없다. 북연 잔당을 소멸시키지 못한 관계로 백제를 힘들게 만든 북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측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의 큰 줄거리는 사실로 인정되어진다.

고구려의 강습을 받아 한성을 상실하고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 국력을 회복한 이가 무녕왕이었다. 무녕왕은 ‘누파구려(累破句驪)’ 즉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한 후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했다. 무녕왕이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데는 백제의 원래 모습이 ‘강국’이었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쇠잔했지만 이제는 원래의 강국 면모를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제하면 약소국이 아니라 강국 이미지를 연상하는 게 긴요해진다. 이에 덧붙여서 국력의 척도가 되는 인구수만 보더라도 백제는 고구려를 앞질렀다. 동일한 7세기 전반 경에 백제는 76만 호인데 반해 고구려는 69만 7천 호에 불과했다. 경제력에서는 사족을 불허할 정도로 백제가 고구려보다 우위에 있었다.

교과서 지도를 보면 삼국 가운데 백제의 영토가 가장 왜소하다. 고구려와 신라의 중간에 끼여서 금방 병합될 것처럼 위태롭게만 보인다. 이러한 시각 자료 역시 백제사에 대한 편견을 보태는데 한몫했다. 그랬기에 중국인들이 남긴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도 신뢰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송서』와 『양서』 『양직공도』 『남제서』 등에서는 일관되게 백제의 요서경략과 북위 군대를 격파한 기록이 보인다. 이들 기록은 교차확인까지 되었다. 이렇듯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로부터 공격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 백제는 그만한 힘이 없다는 감성적 정서에 휘둘려 있다.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조선 역대 이래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자는,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양대(兩代)이다”라고 설파했었다. 나아가 그는 백제의 ‘해외식민지’를 운위하기까지 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역임했던 손진태(孫晋泰)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였던 김철준(金哲埈)도 백제의 요서경략을 사실로 받아 들였다. 근자에 중국 학자들이 제기한 강소성 연운항(連雲港) 주변의 무려 789기에 달하는 석실분은 백제와 관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베트남과 접하고 있는 중국의 최남부 지역인 광서장족자 치구에는 ‘백제’ 지명이 숱하게 남아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 밖까지 뻗쳐있어, 삼국 가운데 백제 영토가 가장 왜소하다는 인식의 오류를 벗겨준다.

백제인들은 중국대륙이나 일본열도를 벗어나 동남아시아 세계와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백제 말기 장군인 흑치상지(黑齒常之)의 흑치씨는 본디 부여씨 왕족이었지만 흑치 지역에 그 조상들이 분봉된 데서 유래를 찾았다. 흑치는 한반도 어느 지역이 아니라 필리핀을 가리킨다. 근자에 이곳 박물관에 진열된 삼국시대 토기가 그 사실을 웅변해준다. 백제와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교류는 문헌적 근거가 적지 않다. 게다가 고고학적 물증까지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백제사의 무대를 한반도를 뛰어넘은 광활한 공간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필자는 이를 염두에 두고 ‘글로벌 백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이 백제 사비도성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끝으로 우리 스스로 범한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자성이 필요하다. 가령 사적 제11호인 ‘서울 풍납동토성’을 너도나도 ‘풍납토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풍납토성’으로 표기하니 그게 맞는 것처럼 비친다. ‘풍납’은 전해오는 성 이름이 아닌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적힌 백제 왕후의 부친인 사탁적덕(沙乇積德)의 ‘乇’ 자를 ‘탁’이 아니라 ‘택’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안내 책자에는 ‘宅’으로 변형시키기까지 했다. 익산 천도와 관련한 『관세음응험기』에 적힌 지모밀지(枳慕蜜地)라는 지명의 ‘蜜’자를 ‘密’로 잘못 기재한 경우들이 많다. 이러한 오류와 왜곡을 지적해 주면 고맙게 여기는 게 아니다. 발끈하는 볼썽 사나운 광경도 더러 목격되고는 한다. 혹은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형편 좋게 말하는 이도 있다. 모두 부끄럽게 여겨야 할 우리들의 민낯인 것 같다.

역사 연구의 기본인 사실에 충실하는 자세가 절실해진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 기본을 넘어 백제사의 복원이라는 명제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백제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몇 가지 상념을 적어 보았다.

 

글‧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사진‧(재)백제세계유산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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