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한국 미인(美人)을 통해 본 화장의 역사
작성일
2014-03-1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2841

한국 미인(美人)을 통해 본 화장의 역사 - 한국의 미인(美人) 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화장 경향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을 했고,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에 주안을 두었으며, 깨끗하고 맑은 피부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화장술은 문화의 내부 원인으로 변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복수의 문화가 서로 교차할 때 이(異)문화의 미의식에 영향을 받아 미추(美醜)의 기준이나 화장법이 변화하기도 하였다.

 

전통 화장(化粧)사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흰색에 대한 호상(好尙), 미를 존숭(尊崇)하는 생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희고 윤택한 피부는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였고, 그래서 남녀 구분 없이 백색 피부를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미의식은 우리 조상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목욕을 즐겼다거나 천연재료 등을 이용한 화장품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智)·덕(德)·체(體)의 합일을 추구, 내면의 미와 외면의 미를 동일시하는 상황 아래에서 피부의 청결을 중시하였고, 피부를 정결하게 하는 목욕을 자주 하였다. 누구든지 깨끗한 옷에 정결한 신체를 간직하기 위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와 빗질을 하였으며,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손발을 씻는 등 청결하면서도 단정한 몸가짐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처럼 아름다움과 청결을 중시했던 미의식은 삼국시대부터 화장과 화장술이 발달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반드시 화장을 포함한 정장을 하였다. 이 관습은 고구려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公事)에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금은주옥(金銀珠玉)으로 치레하였다고 한다. 조선 24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남긴 복식에 관한 지침서 『사절복색자장요람』에 보면 조선시대 여성들은 계절에 따라서 화장법과 의상과 장신구도 달리해 멋을 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미의 극치는 어디까지나 한국인답게 개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체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01. 북한문화재 국보 제30호 수산리 벽화무덤 ⓒ문화재청
02.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 문효공과정경부인영정 중 정경부인 모습. 안면에 옅은 복숭아꽃 색을 그대로 본 따서 칠하고 입술연지만을 발랐다. ⓒ문화재청

 

영육일치사상으로 발현된 삼국의 화장

우리나라 사람들의 화장 경향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에 주안을 두었다. 고분벽화 속 인물화를 보면 갸름한 얼굴곡선에 백옥(白玉) 같은 피부, 가늘고 얇은 일자형의 끝이 살짝 둥글려진 눈썹, 가늘고 긴 눈매와 넓은 이마, 홍조 띤 붉은 볼에 연지를 찍었다. 작고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은 우리나라 미인의 조건을 두루 갖춘 모습이다. 고구려에서는 연지를 이용한 화장법이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직업을 구별 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에 무녀와 악공이 이마에 동그랗게 연지를 그렸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산리 벽화무덤, 쌍기둥무덤 속 인물화는 고구려의 화장형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둥근 얼굴형에 양 뺨에는 연지화장을 하였는데, 당대의 연지화장이 뺨 전체에 진하게 펴 발랐다면 벽화에서 보여지는 연지화장은 둥근 형태의 점을 찍은 듯한 형태이다. 이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 깊이 자리한 동그라미에 대한 미의식의 표현이며 자연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눈은 가늘고 눈동자는 표현이 안 되었으나 눈두덩이의 붉은 화장은 현대의 아이섀도(eye shadow)와 유사한 형태로, 중국의 화장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화장법이다.

신라 때에 와서는 남성들도 화장을 하였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화랑(花郞)의 화장이 그것이다. 미소년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분을 바르고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하는데, 이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은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화랑으로 삼았는데, 중국 당나라 학자가 쓴 신라의 역사책 『신라국기』에 보면 “귀인의 자제로 아름다운 사람을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화랑이라 이름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해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에 이르기까지 화장을 하였고 아름다움을 귀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우아함이 깃든 고려인의 아름다움

고려시대가 시작되면서 기생이 짙은 화장을 함으로써 직업 여성은 야한 화장, 여염 부녀자는 엷은 색조의 화장이라는 이원화된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조선 전기 문신 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에서는 당시 화장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색조 면에서 특히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는데, 안면에 옅은 복숭아꽃 색을 그대로 본떠서 칠하고 입술연지만을 발랐다. 평소에 거할 때나 소례 시에는 피부를 청결하게 가꾸고 담장을 하였으며, 환갑이나 혼례 등의 성장(盛粧)을 필요로 하는 의례 시에는 농장(濃粧) 혹은 응장(凝粧)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초상인 영의정하연부부영정 중 하연 부인의 모습을 살펴보면 화장의 형태는 짧지만 굵은 눈썹은 곡선 형태이고, 동그란 눈은 눈썹과 동일한 크기로 표현되었으며, 입술은 붉고 크기는 보통이다. 볼과 이마, 턱에 연지와 곤지가 동그랗게 그려졌으며 색상은 붉다. 하연 부인상은 얼굴에 분을 바른 뒤 볼 전체에 엷게 홍을 펴 발랐고 입술연지를 붉게 하였다. 양 볼과 이마와 턱에 연지를 찍었고, 눈썹을 굵게 그렸으며, 입술에 연지를 발라 홍장을 하고 있다. 이런 화장 형태는 백제 궁녀사(宮女祀)의 영정에서도 볼 수 있다. 평상시에는 볼과 입술에만 연지화장을 하고 혼례 때는 이마 연지(곤지)도 같이 찍었다고 한다.

03.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8호 영의정하연부부영정 중 하연부인 모습. 얼굴에 분을 바른 뒤 볼 전체에 엷게 홍을 펴 발랐고 입술연지를 붉게 하였다. ⓒ합천군청
04. 등록문화재 제486호 운낭자상은 진수아미 미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계급에 따라 다른 조선시대 화장법

궁중여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은 담박한 기초화장을 했지만, 기녀들은 고려의 교방화장법을 계승해 화려한 색조화장을 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화장은 진하진 않았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부드럽고 세련됨을 알 수 있다. 얼굴은 복스럽게 둥글고 야위지 않으며 살빛은 흰 편이고 흉터나 잡티가 없었다.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칠하고 분을 바르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였으며, 화장한 모습이 화장하기 전보다 확연하게 달라 보이면 야용(冶容)이라 하여 크게 경멸하였다.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칠하고 분을 바르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였으며, 화장한 모습이 화장하기 전보다 확연하게 달라 보이면 야용(冶容)이라 하여 크게 경멸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악원(掌樂院)의 예기(藝妓) 선발과 관련해 ‘분칠’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연산군은 여인을 간택할 때 “어찌 분칠한 것을 참 자색이라 할 수 있겠느냐? 옛 사람의 시에 ‘분연지로 낯빛을 더럽힐까봐 화장을 지우고서 임금을 뵙네’라 하였으니 앞으로 간택할 때는 분칠을 못하게 명하여 그 진위를 가리게 하라”고 하였다. 이는 단순히 분 화장만 금한 것이 아니라 진색을 알기 위하여 야용을 금지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연지화장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종 3년(1866년)에 행해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에서 관찰되는데, 혼례에 앞서 명하여 초간택 시에 참여하는 처자들이 궁에 들어올 때는 분만 바르고 성적(成赤)은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적은 이마를 4각이 되게 족집게로 솜털을 뽑고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는 색채화장을 의미한다. 초간택에서 성적을 금하고 재간택과 삼간택에서는 성적을 금한다는 명이 없는 것은 재간택과 삼간택에서는 색채화장을 허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의 태조는 교방을 설치해 기녀들에게 화장을 가르쳤다. 백분으로 얼굴을 하얗게 한 후 먹으로 눈썹을 그리고, 뺨은 복숭아 빛, 입술은 앵두 빛 연지를 칠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미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 전체 골격은 풍만하고 건강한 편이고, 머리카락은 검고 숯이 많으며, 표정은 부드럽고 인중이 긴 편이다. 또한 앵두처럼 붉고 작은 입술과 초승달같이 흐리고 가느다란 눈썹에 쌍꺼풀 없이 가느다란 눈, 마늘쪽처럼 생긴 자그마한 콧방울과 반듯하고 넓은 이마는 사실주의적 미의식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다. 얼굴은 복스럽게 둥글고 야위지 않으며, 살빛은 흰 편이나 흉터나 잡티가 없었다.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칠하고 분을 바르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운낭자상>에 나타난 얼굴화장은 진수아미(.首蛾眉) 미용법을 따랐다. 이 화장법은 족집게를 이용한 ‘뽑는 미용법’인데, 고대 여인들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미용법이다. 진수아미는 넓고 네모 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인 여자 얼굴을 형용한 말로, 오랫동안 이 미용법이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고구려 벽화의 여인상, 가락국기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 등과 조선전기 하연부인상 등 조선여인들의 얼굴도 진수아미 미용을 한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는 미의식과 화장 문화가 이원화를 보이나 후기로 오면서 신분제도의 변화와 유교 윤리의 약화로 일반 여성도 기녀의 화장양식을 모방하였다.

과거 여인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통해 시대에 따라 화장법이나 미의 기준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변치 않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본래 타고난 아름다움을 헤치지 않는 화장, 내면의 아름다움이 발현된 화장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선조들의 삶의 자세,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 몸을 가꿈으로써 마음도 가꾸려 노력했던 노력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계승 발전시켜야 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글 방기정(대전대학교 뷰티건강관리학과 교수)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