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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선조의 목욕문화
작성일
2013-12-03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1213

일본 고객이 상담 차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찜질방이 세계 최고라고 들었다며 가보고 싶어 했다. 주변 지인들에게 탐문하여 용산
모처에 외국인들이 많이 가는 찜질방에 들어서면서 얼굴이 화끈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최고의 입지에 대규모 공간, 최첨단 시설을 두루 갖췄으나
국적불명의 화려한 장식들 속에서‘우리 것’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목욕을 하는 입욕방식은 각 국가의 고유한 생활문화를 나타내는 것
으로 국가별로 고유의 목욕행위를 한다. 이렇듯 민족별, 시대별 목욕문화는 각각의 문화와 사회적 가치관, 자연환경, 행동양식에 따라 변천하고
발전해왔다. 우리 선조들의 다양한 목욕문화를 살펴보는 계기로 한국이 목욕산업 강대국으로 발전, 계승되길 바란다.

01. 국보 제135호『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중〈단오풍정〉. 계곡으로 피서 온 여인들이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목욕문화도 역사와 더불어 시대별 가치관에 따라 발전

우리 민족의 목욕문화를 개괄해보기에 앞서 우리 선조들은‘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물에 얽힌 탄생설화를살펴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담장이 덩굴로 덮인 우물가에서 탄생하여 동천에서 목욕한 후 광채를 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을 신성시하는 관념에서 샘이 있는 집은 샘굿을 하였으며, 의례행사로만이 아닌 샘물에 대한 토속신앙으로 자리 잡아 평상시에도 행해진 것이다.

목욕문화의 전성기로 떠오르는 곳은 고대 그리스지만 만개한 시기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로마는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목욕탕을 종합놀이공간으로 발전시켰다. 일본은 환경자원인 온천과 접목한 노천탕의 목욕문화를, 아랍인은 척박한 모래바람과 장거리무역과 이동문화에서 오는 피로를 풀기위해 아랍식,하맘 목욕문화를 발전시켰다(비교문화여행, 권삼윤, 1998). 예를 들어 서구인은 욕조 속에서 몸을 씻고 샤워를 하나, 우리는 욕실에서 씻고, 욕조속에 몸을 담근다. 이와 같이 입욕행태가 다른 이유는 목욕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목욕문화도 역사와 더불어 시대별 가치관에 따라 발전해왔다.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

사전적의미의‘목욕’은머리를감으며온몸을씻는것이고,‘목욕재계’는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신라시대는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목욕이 습관화되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을 내리기도 했다. 삼국과 고려의 불교가 목욕재계를 율법으로 정하면서 주술적 수단이었던 목욕이 진일보했다. 불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우리민족의 목욕문화는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는 백제왕이 불상, 경전을 일본에 보내면서 함께 전파되었으며 불교가 발전한 통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다. 이는『先ぅ風俗史』라는 일본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한증탕이 일본 서민들의 공동탕으로 지방에 널리 퍼졌다는 일본의 목욕풍속이 기록되어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목욕문화는 고려시대 서민들의 생활양식으로 전승되어 대중화되었다. 그동안 주술의 수단이었던 목욕은 고려시대부터 질병치료 및 예방의학의 개념이 정립되었으며,『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온천의 치료효과에 관한 고려인들의 목욕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고려사절요』에는 역대 왕들은 온천행차를 즐겼으며 병이 난 신하에게 온천욕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02. 입욕제로 쓰였던 마늘. 조상들은 미용목욕 개념으로 찐마늘을 목면망에 담아 식초를 함께 섞어 마늘탕을 즐겼다. 
03. 단오에는 예로부터 창포의 잎과 뿌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던 풍습이 전해진다. 옛 여인들은 이렇게 하면 1년 내내 병치레를 하지 않으며 머릿결과 피부가 비단결같이 고와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유교사상 ‘알몸전신욕’ 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

조선시대로 오면서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종교적 환경의 변화로 목욕문화가 변화를 맞게 된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남녀의 혼욕과 알몸 노출목욕을 불온한 행위로 간주하여 황실이나 양반들은 목욕전용 옷을 걸치고 전신욕을 하였다. 이때부터 집에서 옷을 입은 채, 겨우 함지박과 대야를 이용한 수준의 부분 목욕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시대 목욕풍속은 성문화를 퇴폐시하는 유교사상이긴 하지만 청결을 중시하여 부분목욕문화가 발달한 시기이다.

조선시대에는 개별가옥에 목욕탕이 별도로 없었으며 황실에서도 세수간 나인이 목욕물을 별도로 준비해 올렸다. 궁안과 양반가의 부분목욕문화는 상이하지 않았다. 조선의 부분욕은 낯씻기, 손씻기, 발씻기, 뒷물, 이닦기, 머리감기로 구분된다. 하루에 꼭 하는 부분욕으로 세수, 이닦기, 뒷물이 있다. 수시로 하는 것은 손, 발씻기이다.

조선의 목욕풍속이 부분목욕이다 보니 전신욕은 연례행사로 별도 행해졌는데, 그 시기는 음력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7월 15일 등(늦봄에서 늦여름)이다.

귀족계급에게 국한, 서민과는 별개의 목욕풍속

우리 민족 복식풍속이 버선을 신는 것이어서 발가락 사이 때가 끼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궁안을 중심으로 귀족계급에게만 별개의 미용목욕 개념이 발달하였다. 그 방법은 자연에서 얻은 식물의 잎, 줄기, 열매, 뿌리줄 등을 중탕하여 목욕물에 섞어 입욕하는 미용탕으로, 대표적인 것은 인삼잎을 달여 넣은 인삼탕과 찐마늘을 목면망에 담아 식초를 함께 섞어 마늘탕을 즐겼다. 보편적으로 효과적인 미용탕인 난탕은 몸에서 은은한 향내를 나게 하는데 효과적이어서 혼례를 앞둔 상류층 신부에게 즐겨 행하는 탕요법이다.

고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온천욕을 즐겼는데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온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세종, 세조가 온양온천에 머무르며 목욕하고 유숙하였다고 한다.

04. 강원도기념물 제73호 양양동해신묘지(재실). 능역 입구에 있는 재실에는 목욕실을 두어 몸을 깨끗이 하고 제례를 준비하도록 했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제례에 임한다는 뜻이다.
05. 중요 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중 샘굿. 샘굿은 수리 시설이 미흡하던 때 물을 섬기던 신앙이 발전한 의례로, 우리 조상은 물을 신성시 하는 관념에서 샘이 있는 집은 샘굿을 하였다.

치료를 위한 전신욕, 온천욕과 한증욕

한증욕이란 흙, 바위를 소재로 불로 달군 후, 멍석, 가마니를 깔고 눕거나 앉아 땀을 내는 방식으로 현대의 불가마가 한증법의 유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특색에 따라 바위, 흙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한증방법은 같지만 약효는 차이가 있었다. 한증욕 풍습은 그 후에도 산야초(감나무순, 밤나무순 등)를 끓여 수증기를 쬐는 방식으로 발달하였으며 현대의 스팀미용법의 유래로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 1905년 서울 서린동에 개업

왕실에서는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1905년 서울 서린동에 문을 연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모르는 사람끼리 발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에 익숙지 않은 문화라서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 본격적으로 생겨났으며, 1962년 최초로 한증막이 등장했다. 2000년대 서울에 여탕 없는 대중목욕탕이 등장했으며 이는‘목욕 성차별’사례의 원조다. 여자들은 목욕을 오래하고 물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수지가 안 맞는다는 논리였다. 전 국민이 추석이나 설날을 앞두고서야 일 년에 두세 번 목욕하는 것이 일련의 행사였던 시절, 목욕탕에 가면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빨래까지도 서슴지 않은 엄마들의 모습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06. 인삼잎. 미용탕은 자연에서 얻은 식물의 잎, 줄기, 열매, 뿌리줄 등을 중탕하여 목욕물에 섞어 입욕하는 것으로, 인삼잎을 달여 넣은 인삼탕이 대표적이다. 
07. 강화 교동도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한증막 터. 이 한증막은 조선후기에 축조하여 사용하던 목욕시설로 소나무 가지 등을 이용하여 불을 지펴 그 열기로 한증욕을 하던 목욕 시설이다. 
08. <온양행궁도>. 세종을 비롯해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여러 임금이 온양에 행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 차 머무르며 정사를 돌보았다.

한국 목욕문화의 해외수출

1993년에 세계에서 목욕을 가장 즐기는 나라인 일본에 한국형 사우나와 때밀이 문화가 진출했다. 현재도 일본 주부와 직장 여성들에게 ‘이태리타올’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세계인에게 목욕산업 강대국으로 한국이 소개되고 있는 요즘, 때밀이 문화만이 아닌,한국천연자원의 입욕제 개발, 찜질방에서의 전통놀이 프로그램, 한국전통의복양식의 목욕가운 등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가 한국 목욕문화로 재정립되기를 바란다

 

글. 한은희 ((주)한스코인터내셔널 대표, 건국산업대학원 행정학과 외래교수)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속신앙사전,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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