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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글씨에도 표정이 있다는 거, 아세요?
작성일
2013-04-1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806



거부할 수 없는 한글의 매력

말하듯 부드럽게 흘러가는 글씨. 일명 ‘보고 듣는 글씨’인 캘리그라피는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삶과 부쩍 가까워졌다. 광화문 서점의 글판은 도심 속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음료와 엽서 등 각종 제품에 쓰여진 글씨들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한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달려있는 커다란 글판의 주인공 박병철 씨는 현재 약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캘리그라피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국내 독보적인 인물 중 하나다. 30년 전엔 럭비선수로, 20년 전엔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그는 한글의 매력에 푹 빠져 10년 전 캘리그라피스트라는 미지의 영역에 뛰어들었다.

“약 20년 전쯤, 제가 디자이너로 활동할 당시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수작업으로 모든 게 진행됐어요. 저는 아날로그 감성이 많아서 그런지 손으로 작업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어요. 그렇게 붓과 글씨와 매일을 함께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글씨를 디자인하고 쓰는 것이 제 삶의 일부가 됐어요.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은 거죠.” 사실 지금이야 캘리그라피스트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직종이었다. 글씨로 디자인을 한다는 개념 자체도 생소한 시절이었으니 캘리그라피스트로써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삶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고 볼 수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철 씨는이길을 택했다. 단지 한글의 아름다움이 좋아서다.



속닥속닥, 옆에서 속삭이듯

캘리그라피의 사전적 의미는 ‘아름다운글씨’다. 여기서 의미를 더욱 확장하면 표현하려는 단어 혹은 문장을 작가의 시각대로 새롭게 해석해 마치 글씨만 보아도 소리와 모양,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운동성과 역동성이 가미된 글씨를 뜻한다. 스토리와 컨셉이 작품 속에 스며들어 많은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아름다움만 추구해서는 안되는 게 캘리그라피다.

타 언어와 다르게 한글이 다양한 표현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과, 일렬로 나열되지 않고 초성·중성·종성이 한 데 모여 뜻과 발음을 이룬다는 특징은 한글이 캘리그라피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우리나라 말은 한 가지 뜻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죠. 이 작업이 글씨로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때 더 유리하거든요. 또한 초·중·종성이 한데 모여 있어서 디자인 할 때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 수 있어요.”

잡히는 것이 도구… 나뭇가지는 최고의 펜촉

그가 만든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니 과연 어떤 도구로 이러한 글씨들을 탄생시켰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박병철 캘리그라피스트는 자신의 ‘펜’들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공개했다. 붓과 펜을 상상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이었다. 나뭇가지와 나무젓가락, 숟가락과 칫솔, 다 쓰고 버린 화선지 뭉침과 심지어는 셔틀콕까지 과연 도구가 안되는 게 뭔지를 묻는 게 더 빠를 듯 싶었다.

“기본적인 문방사우文房四友외에도 보이는 것은 모두 도구로 사용해요. 특히 나무젓가락은 만년필 이상이에요. 칼로 잘 다듬어 사용하면 웬만한 펜촉보다 제 기능을 더 잘하거든요. 숟가락에 먹물을 묻혀 사용하면 움푹 팬 쪽으로 잉크가 살짝 고이기 때문에 붓처럼 써지기도해요. 이런 모든 것들이꼭좋은 도구는 아니더라도 각각의 특성에 따라 표현되는 느낌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가장 적합한 재료를 찾으려고 하죠.”

그의 경우 화려함보다 절제미를 강조하는 만큼 나뭇가지와 나무젓가락처럼 단순하게 표현되는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작품을 만들수록 점점 단순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초창기에는 글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면, 지금은 모든 힘을 풀고 여유와 담백함을 즐긴다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단순한 선으로 필체를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을 주로 찾게 되죠.”



한글, 상형적 표현 충분히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한자는 상형문자로, 한글은 표음문자로 알려져 있다. 한자는 형상에 기초해 만들어진 언어이며 한글은 음성에 기초해 세워진 언어라는 의미다. 때문에 보여지는 것을 중요시하는 캘리그라피에서 한글은 한자만큼 의미하는 대상을 표현하는 것에 취약하다는 이야기들이 오고가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자 ‘山’으로 산의 모양을 나타내기는 쉬워도 한글의 ‘산’이라는 글자로 산을 나타내기는 어렵다는 주장들이 제기된 것이다. 하지만 박병철 캘리그라피스트는 한글로도 얼마든지 단어의 모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가 ‘땅’,‘별’,‘산’,‘꿈’등의 단어로 캘리그라피를 한 모양새를 보니, 진짜 땅과 별, 산과 꿈이 느껴졌다. ‘땅’의 경우 옆으로 단어를 길게 늘어트렸고 ‘별’의 경우 ‘ㄹ’받침을 별의 뾰족한 각처럼 화려하게 흩뜨렸다. 또한 ‘산’의 경우‘ㅅ’을 거대한 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모양으로 만들었고 ‘꿈’은 설렘을 가득 안은 형상으로 몽글몽글하게 표현했다.
“한글로도 모든 조형적인 면들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어요. 글자 속에 오묘한 형상들이 숨어있거든요. 아직 한글에서는 이러한 요소가 많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것이 우리 캘리그라피스트가 연구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어요. 글자 자체의 예술적 접근을 통해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리는 소중한 발판도 캘리그라피스트들이 만들어나갈 수 있겠죠.”

캘리그라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있는 만큼, 공급자도 많아지는 추세다. 하지만 박병철 씨는 이런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캘리그라피는 상상력이 첨가되기 때문에 서예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더욱 화려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디자인에 치중한 나머지 가독성을 놓친다는 점이에요. 멋스러움만 강조하다보니 의미전달은 약해진 셈이죠. 이러한 좋지 않은 점을 줄여 나가는 게 지금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공급이 많아지고 있을 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며 현명하게 가지치기를 한다면 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겠죠.”
그는 현재 ‘힐링캘리그라피’로 사회복지단체 등을 찾아가는 재능기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거품은 쑥 빼고 오직 글씨와 이야기로만 소통하며 진정한 치유를 나누고 싶다는 그간의 바람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솔직한 대면의 장을 캘리그라피로 나타내고 싶다는 박병철 씨. 그는 오늘도 영혼이 담긴 글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글. 황정은 사진. 이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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