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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옛 담장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 - 반교마을 옛 담장
작성일
2013-04-1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613



마을의 길잡이 옛 담장

한때 우리는 중심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에 치중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중심이 아닌 것에 대한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가령,한마을에 대한 역사가 그렇다. 역사의 중심에선 비켜져 있지만, 또 다른 주인공들이숨쉬고 있는 마을엔 우리네 삶의 역사가 있다. 4월의 봄바람은 중심과 변두리, 이 두 가지의 역사가 충족되는 한 지역의 여행을 시작했다.

마을의 입구부터 제멋대로 만들어진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 봄바람을 반긴다. 이곳은 돌담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 충남 부여군 외산면의 반교마을이다.이마을은 차령산맥에서 이어진 아미산자락을 뒤로하고 반교천을 앞세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산촌마을이다. 반교마을은 유독 암괴류가 발달한 부여의 서북쪽 산의 영향을 받아 어느 곳을 파보아도 돌이 많이 나온다 하여 도팍골로 불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널판을 다리로 쓰는 마을이라 하여 ‘판교’로 불리다 지금의 지명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 언젠가부터 외지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게 된 이유는 ‘돌담’때문이다. 반교마을의 돌담은 마을에 ‘휴휴당休休堂’을 짓고 오도이촌五都二村의 생활을 하는 명지대 유홍준 교수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뜻을 모아 잘 보존되어 온 마을의 담장을 그 역사적 가치를 높이도록 주변을 정비하여 ‘옛담장’으로 다시태어났다.
그리고 2006년 12월 ‘부여 반교마을옛담장’으로 등록문화재 제280호에 이름을 올렸다. 소박하지만 보는이로 하여금 옛 정취를 느끼게하는 이 돌담은 충청도에서는 유일한 등록문화재 돌담이기도 하다. 그런 영예를 가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담은 그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이 자리가 내 고향이오하듯 편안한 얼굴로 마을의 길을 안내한다.

옛 담장은 언뜻 보면 제멋대로 쌓아놓은 돌담인 것 같지만, 나름 건식 쌓기라는 축조방식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건식쌓기는 큰 돌을 지대석 삼아두줄을 만들고 점점 작은 돌을 쌓아 올린후, 군데군데 빈공간에는 자잘한 돌이나 흙을 넣어 안정감 있게 담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큰 돌, 작은 돌이라도 크기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돌담의 재료는 마을 주위의 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석 막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담의 모습이 왠지 정감가고 익살스럽다. 반교마을의 길가에는 조금 낮은 돌담, 집 주변에는 방풍의 역할을 위해 조금 높은 돌담이 꼬리를 이어 둘러져 있다.이길을 걷노라면 마치 담너머 파란지붕, 빨간지붕에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 돌담에 새겨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같다. 봄을 맞아 돌담을 배경으로 자라난 개나리, 벚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더욱 생생한 까닭은 아마도 누군가 매일 이 생명들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반교마을은 등록문화재 돌담과 더불어 자연, 그리고 사람 사는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서 더욱 정겹다.



중심과 변두리, 이젠 하나가 되어버린 그곳 부여

반교마을이 속한 부여는 고대 삼국중제일 먼저 전성기를 누렸던 백제의 세번째 도읍이다. 부여는 백제시대 이래 그대로 군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름 그 자체로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백제는 한성 함락 후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내기 위해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백제는 천도를 계기로 위기에서 발돋움을 하게 되고 새로운 위상에 맞는 또 다른 수도 이전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협소했던 웅진지역이 갖는 지리적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는 부여가 물망에 올랐던 것이다. 당시 도읍으로 있던 부여의 모습은 어땠을까. 한적하고 조용한 지금의 풍경과는 달리 무척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모습은 아니었을까. 르네상스를 바랬던 당시 백제인의 모습들을 생각해보니 한 때 이곳은 희망이고 꿈이었다. 실제 부여는 금강이 감돌아 방어에 유리했고 이남의 넓은 평야 지역의 생산물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확충할 수 있는 유리한 곳이었다. 이러한 이점이 부여를 전근대시대에 걸쳐 농산물과 해산물을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고대에는 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강성했던 것은 풍성함이 사람들의 빈부에 영향을 미치고, 나라의 국력에 힘을 실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는 부여에 자리를 잡으며 한강 하류까지 점령하는 등 국력이 신장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멸망에 이르렀기 때문에 백제의 흥망성쇠를 엿볼수있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부여에는왕궁지, 궁남지, 불교유적을 비롯해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되어있다.백제와 교류가 깊었던 일본 관광객이 자기 문화의 원류를 찾아 이곳에 몰려드는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에 걸쳐 있는 부소산성은 나지막한 부여의 진산에 자리 잡은 성터로 백제의 마지막 보루가 된 곳이다. 잘 알려진 백제의 의자왕, 계백장군, 삼천궁녀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부소산은 역사를 품은 채 봄단장에 한창이었다. 볕과 그늘이 골고루 섞여 포근한 부소산에서의 봄날은 부여의 커다란 역사와 함께 오늘의 추억을 나만의 역사처럼 만들기 좋은날이다. 부담 없이 걷기 좋은 부소산의 토성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다 보면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우직한 낙화암과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백화정을 만날 수 있다. 백화정에 올라 백마강을 내려다보니 아득한 절벽에선 그 옛날 궁녀들의 한서린 모습들이 아련히 느껴진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들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이들이 그녀들을 애도하고 있으니 조금이나그 한을 풀었을까. 어쩐지 애잔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는 이유는 사라지는 것들을 뒤로하고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들 때문이다. 도읍으로 융성했던 부여는 역사가 되고 오늘날의 부여는 작은 마을들을 품으며 사람사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다.

봄바람은 작은 마을과 큰 도읍을 거쳐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조그마한 가게 앞에 멈추었다. 돌담하면 경상도였는데, 충청도에도 있었고, 서울하면 지금의 서울만 생각하는데 부여에도 있었고, 막국수하면 춘천이었는데 이곳에도있다 .해넘이가시작되면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향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영업하는 이곳에서 많은 것 들을 보고느끼느라 금세 허기진 배를 달래본다.

글. 김진희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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