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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처용무,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우뚝 서다
작성일
2015-01-0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790

처용무,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우뚝 서다. '서울(도읍지 금성, 현 경주) 밝은 달에 밤 늦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처용가로 더욱 친숙한 처용무는 한국의 궁중정재 중 사람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유일한 작품이다.

01.『악학궤범』중「기사경회첩」<본소사연도>에 나타난 창경궁관처용. 행렬을 지어온 이들이 기로소에서 처용무 가연을 즐기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02. 처용무는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가면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문화재청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우뚝 서다

처용무의 모티브에 관한 기록은『삼국유사』의「처용랑·망해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헌강왕이 개운포(학성의 서남, 현 울주)에 행차하였을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여겨 주변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천문을 담당한 관리가 말하기를 “이것은 동해 용왕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은 명하여 근처에 절을 지어주도록 하였는데, 이에 감동한 용왕은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그 아들 중 한명이 왕을 따라 서울(도읍지 금성, 현 경주)로 입성하였다. 왕은 그에게 ‘처용’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또한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아주었다. 이 내용을 보면 처용가는 아름다운 부인과 역신, 그리고 처용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된 매우 직설적인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학계에서 이 처용가를 풍월계 향가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태준에 의하면 처용설화는 풍월도에 바탕을 둔 각종 신들의 춤이 중요한 매개체로서, 처용은 춤과 노래로 역신뿐만이 아니라 신령과 교제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시하였다고 한다.1)

1) 김태준, 화랑과 풍류정신화랑문화의 신연구,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1996, 256쪽.

03.《평양감사향연도》중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이 그림에는 조선 후기 궁중정재(宮中呈才)의 하나로 공연된 처용무 장면이 나타난다. ⓒ국립중앙박물관

처용은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역신을 물리치고, 천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처용무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처용의 상징성이 단순한 열병熱病을 치유하는 신앙으로부터 구나驅儺행사 속의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의미를 띤 형태로도 정립된 것이다.

04.‘제2회 한국 명작무 대제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 김중섭이 처용무를 펼치고 있다. ⓒ연합콘텐츠

용맹스러운 남성상, 신라의 화랑花郞처용

고매한 인격의 처용은 과연 어떠한 이미지를 소유한 인물이었을까? 바꾸어 말하면 신라인들은 처용에게 어떠한 이미지를 요구한 것일까? 처용을 ‘처용랑處容郞’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이 사랑하고 동경한 화랑, 다시 말해 용맹스러운 남성상의 표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다. 고대 사회에서 용왕은 전통적인 수신水神과 도교의 용신龍神 신앙이 더해져 만들어진 국가의 수호신으로서 매우 강력한 신격을 발휘한다

더불어 『삼국유사』에도 나타나는 「처용랑·망해사」조가 신라의 망국 설화와 관련 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경계 내용이 설화 속에 담겨있다는 점, 처용이 동해용왕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는 점 등은 당시의 호국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화랑은 신라인들이 나라를 위해 만들어 놓은 호국 집단이다. 호국 집단 화랑에 속한 개개인은 당당하고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선인들처럼 풍류 또한 즐긴다. 풍류를 알고 당당하면서도 유연하게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 당시의 신라인들이 동경하던 화랑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처용무 복장

천년의 세월이 깃든 한국의 미감

통일신라의 헌강왕 대에 시작된 처용무는 1인 처용무로 벽사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였다. 그러던 것이 고려에 들어서는 2인 쌍처용무로 나례에서 연행되었으며, 조선 세종 대에 가사를 개작改作하여 정식 궁중정재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 초기, 벽사의 의미를 지닌 오방처용무로 이어지게 되는데, 음양오행설의 영향을 받은 처용무복의 오방색五方色과 무원의 위치 그리고 무원들의 동선動線 변화는 잡귀를 막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성종 대에 이르러 처용무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당시 처용무의 연행모습을 대략 살펴보면, 두 마리의 학鶴이 무대에 오른 후, 오방처용이 등장하며, 이후 연화대로 연결되어 학연화대처용무합설로 진행된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단순히 3개의 정재를 합쳐 놓은 것이라기보다는 ‘발단-전개-절정-결말’의 구조를 갖추어 놓은 것인데, 특히 ‘처용가무’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구나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후기로 들어서면 처용무는 학무와 연화대무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연희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구나驅儺적 불교적 성격이 강한 처용무가 조선후기 정재사적 흐름 속 향유층의 미감에서 점점 멀어졌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처용무가 주는 교훈, 앞으로 천년

처용무는 한국 궁중정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근대 초기 국가 악무 기관의 실질적 해체 등 급박한 사회 변화 속에서도 그 정체성을 꿋꿋하게 지켜온 한국 궁중정재의 표상이다.

그러나 처용무는 결코 불필요한 고집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처용무만의 고유성은 유지하되 나머지 것들은 과감히 그 시대와 사상에 맞추어 변모를 계속하였다. 즉, 처용무는 당대 사람들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계속해서 재평가되며 변천과 발전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처용무를 통해 볼 때, 한국의 전통은 일방적 아집이 아닌, 당대의 가치판단을 기초로 새롭게 변화하고 발전하여왔음을 알 수 있다. 천년을 이어 온 처용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화 유산이다. 앞으로 다시 천년 이상을 이어나갈 처용무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05.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 성종때부터 궁중의식에 사용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문화재청 06.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 처용암. 세죽마을 앞바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바위로, 처용랑(處容郞)과 개운포(開雲浦)의 설화가 전해진다. ⓒ문화재청

글 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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