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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문화재의 뒤안길(72)-경주 봉황대(서울경제, '21.1.4)
작성자
이종훈
게재일
2021-01-04
주관부서
대변인실
조회수
2091

문화재의 뒤안길(72) (서울경제, '21.1.4)  


지름 88m 웅장한 고분…신라국력 상징


이종훈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봉황대 2.jpg 

‘봉황대’는 경주시내 한가운데 자리잡은 신라시대 고분이다.

지름이 88m에 달하는 큰 무덤으로, 두개의 무덤을 합친 황남대총 보다는 작지만, 단독무덤으로는 가장 크다.

봉황대의 주변에는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었던 금관총이나 서봉총, 그리고 금령총 등 신라시대의 큰 무덤이 즐비하다. 이 무덤에는 금관뿐 아니라 금귀걸이 금팔찌 등 화려한 유물이 엄청나게 묻혀있다.

적석목곽분은 나무로 곽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은 신라의 독특한 고분이며, 5세기에서 6세기 전반 정도까지 유행한 무덤 형태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국력이 급성장하던 시기여서, 이렇게 큰 규모의 고분은 국력이 급성장하던 당시 신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봉황대’에서 동편으로 350m 정도 떨어진 쪽샘지구 44호분에서도 금동관과 은제 허리띠, 금·은팔찌와 반지, 그리고 바둑돌 등 신라시대의 화려한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특히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인데, 최근 수십개의 바둑돌이 출토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끌었다. 최근에는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지난 달(12월) 중순부터 다시 문을 닫은 상태이긴 하지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고 있는 이곳은 누구나 그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관람시설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안팎으로 뻗은 산하(山河)는 웅장하고

들판에 넘치는 물색도 풍요롭네

천문 살핀 곳 벽돌 기운 삼엄하고

새벽 알리는 종소리 마음 상쾌하네(이현일의 ‘봉황대(鳳凰臺)’라는 시에서)

 

조선 후기 학자인 이현일(李玄逸)이 27세였던 1654년(조선 효종 5년), 경주에 와서 봉황대를 보고 읊은 시이다. 그는 20세가 되던 해에 과거 시험을 보고 합격했지만 그 답안이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라 뒤늦게 취소되었다고 한다.

몹시 낙담한 그는 이후 형제들과 함께 경주에 들러 봉황대를 비롯해 옥산서원, 김유신묘 등 경주 일대를 둘러보았는데 그의 경주 방문은 시의 내용처럼 새롭게 심기일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새해는 봉황대를 바라보며 심기일전한 조선시대 학자 이현일처럼 우리 모두 심기일전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봉황대 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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