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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대음악문화재에서 찾은 우리의 소리와 역사
작성일
2020-12-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052

근대음악문화재에서 찾은 우리의 소리와 역사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제797호 『대한제국애국가』(1902년 제작, 2020. 10. 15. 등록)와 제474호 『광복군가집 제1집』(1943년 제작, 2011. 8. 24. 등록)은 모양새의 차이와 41년이라는 제작 연도의 긴 간극에도 나라사랑과 자주독립을 소리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지와 실천이 담긴 우리나라 근대사의 상징적인 유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01.대한제국애국가 대한제국에서 1902년 제정 반포한 <대한제국애국가>의 표지 ⓒ문화재청

나라사랑과 자주독립의 열망을 노래한 대한제국애국가

황제국으로 위상을 높이고 근대국가를 지향했던 대한제국은 1900년에 서양식 군악대를 만들고 독일음악가 프란츠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를 초빙하여 군악대를 지도하고 국가를 짓도록 했다. 『대한제국애국가』 악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가(國歌)를 만들어 1902년 8월 15일에 국내외에 공표한 국가 공식 문서나 다름없다.


악보는 대한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려는 듯 두껍고 고급스러운 양장지에 컬러로 인쇄되어 있다. 표지 맨 위에 ‘大韓帝國愛國歌’ 제목 아래 태극을 무궁화가 감싸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대한제국국가]가 아니라 [대한제국애국가]인 것은 자주독립을 열망했던 당시 ‘애국가운동(나라사랑 노래짓기)’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내지는 발문 1쪽, 악보 없이 가사만 쓰인 1쪽, 관악기 총보 4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맥이 통하게 가사를 보완해 보면,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ᄉᆞ/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ᄉᆞ/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ᅳᆯ치사/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ᄒᆞ소셔/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이다. 상제, 곧 하느님이 우리 황제를 보살펴 성수무강하게 하고 복록이 나날이 새롭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1902년 제정 반포된 후 [대한제국애국가]는 국경일, 경축일, 황실의식 등 국가의식과 외교 행사에서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됐다. 1904년에는 각 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지만, 1910년 강제 합병 직후 모든 애국가와 함께 금지곡이 됐다.


하지만 국외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 곡을 창가집에 떳떳이 실어 놓았다. 물론 제목을 달리하고 가사도 ‘황제’, ‘성수무강’등을 ‘대한’, ‘독립부강’ 등으로 바꾸고 곡조도 약간 변형했다. 만주지역 광성학교 『최신창가집』(1914)의 [국가], 하와이 호놀룰루 『애국창가』(1916)의 [황실가]가 그 예다. 이 창가집들은 당시 타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 독립 염원, 항일투쟁을 담은 노래 악보집이다.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다 된 1943년 일제와 직접 맞서 싸우는 전투지에서 1 『광복군가집 제1집』이 발간됐다.


02.광복군가집 제1집 한국광복군이 만들고 부른 『광복군가집 제1집』 표지와 첫 곡 <국기가>악보 ⓒ한종수

대한제국군의 역사가 담긴 광복군가집 제1집

『광복군가집 제1집』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에서 광복군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만든 악보집이다. 광복군 마크를 직접 그려 넣은 표지에 휴대하기 간편하도록 아주 작고 얇게 되어 있다. 이 악보집을 발행한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창설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이었다. 한국광복군은 만주 독립군과 1907년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역사가 『광복군가집 제1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범석, 김학규, 이두산, 이해평, 신덕영, 신하균 등 작사자나 작곡자 한유한은 모두 한국광복군이었다. 『광복군가집 제1집』에는 독립군들이 지니고 다녔던 노래집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 곡이 악보로 실려 있다. 광복군 제2지대에 속해 있었던 한유한(韓悠韓, 본명 한형석, 1910~1996)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유한은 1930년대 후반부터 수많은 항일가곡을 작곡했고 [아리랑](1939)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항일가극을 만든 항일음악가이자 광복군이었다.


한유한은 자신이 작곡한 곡과 당시 유행했던 항일가요 16곡을 숫자보로 적고 전체 절의 가사를 꼼꼼하게 달아서 『광복군가집 제1집』을 만들었다. 수록곡을 보면, [국기가], [2지대가], [신출발],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여명의노래], [우리나라 어머니], [흘러가는 저 구름] 등 자신이 작곡한 8곡이 있고, 이두산 작곡 [광복군가], [선봉대], 신하균 작곡 [앞으로 행진곡]이 있다. 또 한국민요에 가사를 붙인 [광복군아리랑](밀양아리랑), [광복군석탄가](석탄가) 2곡이 있다.


그 외에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다 1942년에 전사한 윤세주 작곡의 [최후의 결전]과 차용된 곡조지만 널리 유행하면서 거의 한국화 된 [용진가]가 실려 있다. 『광복군가집 제1집』은 광복군이 직접 만든 창작곡이 대부분이고 한국민요를 개사하여 만든 곡을 수록하였다. 특이한 점은 광복군도 독립군도 아닌 안익태의 [애국가](1935년 작곡), 즉 현재 우리가 국가로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넣은 것이다. 군가집 맨 처음에 [국기가]와 [애국가]를 나란히 넣어 격식을 갖추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동안 익히 불러왔던 ‘올드랭사인’이라는 외국 곡조를 애국가 악보로 넣을 수 없어서 생소하지만 이 곡을 선택한 것으로 짐작된다.


항일의지를 담은 근대음악문화재

광복 후 지금까지 [애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7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다양한 비판과 논쟁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첫째는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친일파 윤치호로 압축해 벌인 논쟁이다. 둘째는 불가리아 민요와 유사성이 높은 곡임이 밝혀져 논란이 된 표절논쟁이다. 셋째는 작곡자의 친일행위와 관련된 논쟁이다.


그동안 애국자로만 알려졌던 안익태가 1942년 만주국 10주년 행사에서 자신이 작곡한 [만주환상곡]을 지휘했을 뿐 아니라 1940년대 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 등지에서 일제 찬양을 목적으로 벌였던 연주행위가 밝혀진 것이다. 이는 반민족행위가 뚜렷이 밝혀진 안익태의 애국가를 불러야 하겠느냐는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최근 ‘국가 재 제정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국민적 공감대가 될 만한 대안적 곡의 문제로 고민 중에 있다. 그런 점에서, 『광복군가집 제1집』에 실린 [국기가], [광복군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앞으로 행진곡] 등은 작곡·작사자가 독립운동가라는 면에서나 가사와 곡의 우수성에서 볼 때, 애국가나 제2국가로서 대안이 될 수 있다.


첫 국가제정의 경험과 나라의 위상을 높인 증거로 대한제국이 만든 『대한제국애국가』와 항일가요를 담은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의 기록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이 만든 『광복군가집 제 1집』이 소중한 유물로 재인식되고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글. 김수현(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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