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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한 것이다.
작성일
2016-03-03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269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한 것이다 명승 제34호 완도 보길도 윤선도 원림 꽃샘추위도 잊은 채, 버선발로 봄을 맞는 동백. 강렬한 붉음을 머금고도 그 자태는 소담스럽기만 하다. 동백의 섬이라 불리는‘보길도’에 들어서자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윤선도(1589~1671년)의 자취가 짙다. 병자호란 당시 인, 조의 청나라 항복이란 비보를 듣고 세상을 등질 참으로 제주로 향하던 그는 풍랑을 피하고자 닻을 내린 보길도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천혜의 자연을 두고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천 년의 시간을 관통한 요즘의 과객들에게도 다를 바 없다

 

풍랑을 피해 잠시 닻을 내렸던 보길도

겨울꽃의 대명사 동백은 한겨울에 피어 봄날까지 6개월이나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흡사 선비의 굳은 의지와도 같다. 깨끗하게 지는 동백의 모습은 영락없이 청렴의 얼굴이다. 오랜 유배생활 동안 타고난 강직함과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었던 윤선도에게 동백의 섬, 보길도는 꿈꿔왔던 낙원이었을 터. 26세에 진사 급제한 후 유배와 관직 등용을 반복하던 중 1635년 모함에 의해 좌천돼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왕의 가족은 강화도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역시 강화도 행을 자처했다. 하지만 그 사이 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비보를 듣고 속세와의 연을 끊겠다는 황망함으로 뱃머리를 제주로 돌렸다. 거친 풍랑을 피해 잠시 닻을 내린 곳이 보길도의 황원포. 수려한 산세와 청아한 절경은 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나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지었다”라고 <고산유고>에 밝힌 것처럼 윤선도는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음을 알 수 있다. 완도군의 서남쪽에 위치한 외딴 섬 ‘보길도’는 윤선도를 통해 아름다운 정원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들과 계곡, 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나무들. 모든 것이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윤선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깨끗하고 고요한 지기(地氣)였다. 섬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첩첩산중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청정한 기운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숲의 견고함은 파도 소리조차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신비로운 선계가 분명하다.

부용동에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긴 윤선도. 보길도의 자연으로부터 얻은 영감은 윤선도의 서정적이고 절제된 언어로 표현돼 <어부사시사>와 같은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어부사시사>는 세연정에서 바라본 보길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기잡이를 즐기는 모습을 봄, 여름, 가을, 겨울별로 표현하고 있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山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어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江村이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고기잡이를 생존의 수단으로 삼는 치열한 어부의 삶이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즐기는 사람의 시선으로 노래하고 있는 <어부사시사>. 자연 안에 담긴 관념을 찾고자 하는 탐구자적 태도가 드러나 있으며 아름다움을 담담한 정서로 표현하는 서경 지향성이 뛰어나다. 당시 정치 현실이 혼탁했기 때문에 윤선도는 보길도를 표현함에 있어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심미적이고 흥취를 노래하는 공간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8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보길도 원림에서 머물며 마음 닦기를 멈추지 않았다.

깊은 내면의 고요를 일깨우는 비경

고산 윤선도의 자취를 따라 들어선 보길도 원림은 한국식 최고의 정원이라 불릴 만큼 ‘비경’을 자랑한다. 연못과 나무, 독특한 생김의 암석 등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최소한의 인공을 가미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이다.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문신이자 국문학의 한 획을 남긴 시인인 동시에 윤선도는 원림을 통해 천재적인 조경가임을 알 수 있다. 원림으로 들어서기 위해 돌다리로 개울을 건너면 차원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동백나무 터널은 한적한 오솔길을 만들어, 이곳을 찾은 이들의 마음이 고요로 천천히 젖어들게 하는 역할을 한다.

02. 보길도 원림에는 자연 그대로의 신비로움을 갖춘 나무와 바위를 만날 수 있다. 03. 세연정 내부에서 바라본 원림의 경치 04.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천석실

 

그는 격자봉 아래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거처를 만들었으며 무민당(無悶堂)과 정성당(靜成堂)을 짓고 세연정을 증축했다. 세연정 앞은 연못을 만들고 꽃나무를 심어 미적 완성도를 높였다. 눈을 즐겁게 하는 조경 요소뿐만 아니라 판석보(굴뚝 다리)는 건기엔 돌다리로 우기에는 폭포가 돼 연못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자연석으로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한국식 정원의 독특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윤선도 원림은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윤선도의 주거처였던 낙서재 주변과 낙서재 건너편 산 중턱의 동천석실, 그리고 부용동 입구의 정자 세연정이다. 세연정 주변은 여전히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엔 소나무와 배롱나무, 동백나무 등이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과 어우러져 있다. 송어나 은어가 산란을 위해 올라오는 시기에 윤선도는 이 바위들 위에서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고. 바위 중에서도 흑야암은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실제 마주하면 힘차게 뛰어오를 기세가 그대로 전해진다.

낙서재터 건너편 산자락에 동천석실이 있다.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이며, 마주 보고 있는 높은 산이 격자봉, 그 앞에 조그마한 언덕이 조산이다. 윤선도는 조산과 동천석실 앞의 바위에 도르래를 연결해 필요한 물건을 운송했다고도 한다. 그의 기발한 생각들이 번뜩이는 부분이다.

한참을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니 우리 안의 고요가 스며들어 온다. 하나의 조화를 이룬 비경은 또 무엇 하나 손상됨 없이 제 빛깔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비교하지 않고 태생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때 비로소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품을 수 있다는 상념에 젖어본다.

 

글‧이용규 사진‧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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